가사 전담 중 가세 기울어 생업에…"범죄 인식 어려웠을 것"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이른바 '현금 수거책'으로 활동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여성이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새롬 기자 |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이른바 '현금 수거책'으로 활동한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여성이 2심에서 혐의를 벗었다. 2심 법원은 가사 일만 전담해온 피고인이 뒤늦게 생업에 뛰어들었다가 실제 로펌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의 실체를 알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1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5-2부(원정숙·정덕수·최병률 부장판사)는 사기,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사기미수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A 씨는 2020년 12월 은행·카드사 직원 등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원 지시 아래 위조된 문서를 출력해 피해자들에게 내보이는 방식으로 1억 원 상당의 금액을 편취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마지막 범행 피해자가 보이스피싱 범죄임을 눈치채 경찰에 신고하면서 A 씨는 현행범 체포됐다.
1심 재판부는 A 씨의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A 씨에게 보이스피싱 조직 활동에 가담할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로 뒤집었다.
2심 재판부는 A 씨의 성장환경과 문제의 조직에 들어가게 된 경위, 실제 활동 내용 등을 살펴 이 같이 판단했다. A 씨가 구직 사이트를 통해 B 법률 사무소 외근직 업무를 제안받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업무를 제안한 이들은 B 법률 사무소라는 실제 로펌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이었다. A 씨에게 직접 일을 제안한 사람 역시 보이스피싱 조직원이었으나 'B 법률 사무소의 외근직 담당업무 실장'이라고 설명하며 접근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부는 "통상 채용과정에서 구직자가 회사 사무실을 찾아가 대면 면접을 보거나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게 일반적임에도 모바일 메신저로 면접 절차를 갈음하고 사무실에 한 번도 출근하지 않고 일을 바로 시작한게 이상해 보인다"면서도 "구직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이트를 통해 일자리를 소개받았고, 실제 존재하는 로펌을 사칭하고 코로나19 확산 때문에 대면 면접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들은 점에 비춰 피고인 입장에서 로펌 사칭 사실을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A 씨와 같은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은 통상 피해자로부터 수거한 현금을 조직원이 알려준 계좌에 송금하는 방식으로 돈을 전달한다. A 씨는 이와 달리 B 법률 사무소 직원을 사칭한 조직원을 직접 만나 돈을 전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재판부는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은 활동 과정에서 보이스피싱 범행을 경고하는 현금 자동인출기 안내 문구를 보거나, 다수 계좌에 돈을 나눠 송금하는 비정상적인 행태 등으로 보이스피싱 범행을 눈치채게 되는 경우가 많다"며 "피고인은 보이스피싱 조직원을 만나 현금을 전달했고 이 같은 업무를 수행한 날이 모두 4일에 불과해 자신의 업무가 비정상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충분히 긴 시간 동안 업무를 반복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짚었다.
또 재판부는 A 씨가 해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이른 나이부터 가사 일만 전담하다 가세가 기울자 생업에 뛰어든 점에 비춰 "피고인은 단기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했을 뿐 단순 노동에도 고액의 수당을 받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아다녔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봤다. 이밖에 이동시 일반 택시를 이용하라는 조직원의 권유에도 탑승 내역이 남는 택시를 이용하고, 번호판이 노출될 수 있는 자차를 사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한 사실도 무죄 근거로 들었다.
A 씨는 수사과정에서 '법률사무소 외근직 업무를 수행하는 줄 알았다'라고 진술했으나 1심 재판 과정에서 국선변호인의 조력을 받으며 범행을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관해 재판부는 "1심 자백은 이미 벌어진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 양형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고자 한 것으로 보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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