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을 보내며] 34년 재판한 4년차 작가, 시민과 소통에 눈 뜨다
입력: 2021.12.30 05:00 / 수정: 2021.12.30 05:00
박형남 판사가 서울고등법원 사무실에서 <더팩트>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동률 기자
박형남 판사가 서울고등법원 사무실에서 <더팩트>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동률 기자

문학청년서 판사, 판사 겸 작가로…박형남 서울고법 판사 이야기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먼 훗날, 한 판사가 2020년 인문학, 시민과의 소통에 목말라 몸부림쳤다는 평가만 받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박형남 서울고법 판사는 2018년 <재판으로 본 세계사>에 이어 올해 11월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썼다. 전작에서 되새겨 볼만한 세계의 재판을 정리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법정에서 다하지 못한 판사의 이야기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냈다.

그는 시민과 판사가 서로 잘 이해할 때 사법부와 판결에 신뢰가 두터워진다고 믿는다. 판사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판결하는지 인문학적 분석을 곁들여 쉽고 재미있게 소개한 책이다.

그는 판사과 시민의 간극을 좁히려 하지만 '양형'은 그 심적 거리감이 가장 큰 요소다. 시민은 판사가 지은 죄에 비해 가벼운 형을 선고한다고 여긴다. '유전무죄·무전유죄'도 법원 불신을 상징하는 말이다.

박 판사는 "해외에 비해 우리 법원 형량이 결코 낮은 편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그가 법복을 입었던 30여년 전에 비해 형량이 많이 올라갔다. 과거에는 살인죄 평균 형량이 10년 정도였는데 지금은 15~20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형이 만능은 아니다. 시민은 흉악범을 무겁게 처벌하면 사회가 안전해질 거라고 기대한다. 이러한 엄벌주의가 치안에 도움이 되는지는 입증되지 않았다. 죄인은 범죄를 저지를 때 들키지 않을 생각만 할뿐 형량을 계산하지 않는다. 미국 뉴욕시는 1993년 무관용 정책을 폈지만 범죄는 줄어들지 않았다. "시민과 언론은 응보주의적 생각이 짙습니다. 이건 역사적으로, 이념적으로 고민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가난하면 벌받고 부자면 용서받는 '유전유대우, 무전무대우' 사회

박 판사는 우리 법원 양형이 가볍지 않다면서도 성범죄·재벌 총수 범죄 형량은 더 강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재벌은 무거운 죄를 지어도 실형을 피한다는 '3·5 법칙'(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 통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법원이 덮어놓고 봐주는 건 아니다. 총수는 통상 기업에 기여도가 커서 양형에 고려하는 것이다.

"총수 기업 기여도를 양형에 얼마나 고려할지 판사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저는 가급적 (재벌과 일반 시민에) 차별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기여도를 따지라는 법률은 없습니다. 일반 시민은 수천만원대 죄를 지어도 실형인데 재벌 총수는 액수가 훨씬 큰데도 용서받는 건 문제가 아닐까요?"

유전무죄는 '돈으로 좌우되는 한국 사회'에서 비롯된다. 자본주의에서 돈이 많으면 재판에 유리하다. 피해자와 합의하기 쉽다. 합의하면 구속 필요성도 줄어든다. 법원은 재범을 더 무겁게 처벌하는데 빈곤층 재범률이 높은 게 현실이다. 박 판사는 '유전유대우, 무전무대우' 사회라는 개념을 꺼냈다.

"법원은 세상과 동떨어진 공간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범죄를 많이 저지르게 되고 합의를 못해 실형을 살며, 또 재범을 하지요. 우리 사회가 그만큼 부의 분배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돈이 없으면 대우를 못 받는 거지요.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논의해야 합니다."

박형남 판사는 <더팩트>와의 인터뷰에서 판사를 고독한 직업이라 평했다. /이동률 기자
박형남 판사는 <더팩트>와의 인터뷰에서 판사를 고독한 직업이라 평했다. /이동률 기자

34년 경력의 박 판사는 판사를 고독한 직업이라고 했다. '전관예우가 정말 존재하는지'라는 물음에 답하면서다. 박 판사는 "저를 비롯한 한국 판사는 전관 변호사라고 차이를 두지 않는다"라고 잘라 말했다. 박 판사가 생각하는 전관예우라는 말이 존재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시민은 전관예우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전관 변호사를 찾아가고, 비(非) 전관 변호사는 전관이 아니라서 졌다고 생각합니다. 연고를 찾는 전통 아래 전관예우라는 말은 계속 통할 겁니다. 변호사들도 책임면피용으로 이용하고요. 그러나 저를 비롯해 법원은 전관예우를 하지 않습니다."

이영섭 7대 대법원장은 '판사의 독립은 고독과 함께한다'는 말을 남겼다. 박 판사의 생각 역시 같다.

"판사가 후배, 제자라고 같이 밥 먹고 정 붙이면 안 됩니다. 변호사는 (판사에) 신경 쓰이고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결혼식 등 공식 모임은 몰라도 사적 만남은 안 됩니다. 병원만 가도 '아는 의사 있냐'며 연고를 찾는 사회에서는 안 됩니다. 저는 그렇게 삽니다. 검사는 당연히, 아예 안 만납니다."

◆공부 잘 하던 시골소년, 불혹 넘겨 다시 깨어난 '문청 기질'

박 판사는 '문청'(문학청년)이었다. 부모는 공부를 잘하는 막내아들에 기대가 컸다. 그 시절 공부 잘하는 시골 소년이 성공하려면 법대를 가야했다. 서울대에 진학하며 상경한 그는 종로의 한 책방에서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만났다. "교과서랑은 차원이 다릅디다. 이런 책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지요." 스무 살 청년은 작가의 꿈을 가슴 깊이 묻었다. 부모 소망대로 판사가 됐다. 그리고 10여 년은 책을 쓰기는커녕 법서 외 글을 볼 짬도 나지 않았다.

문청 기질이 살아난 건 불혹을 넘겨서다. 마흔다섯 살 무렵 우연히 고미숙 작가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접하며 젊은 날의 갈망이 타올랐다. "이후 10~15년 동안 주말에 도서관에 가서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많이 보입디다. 넓은 세계가 펼쳐지더라고요. 직업이 판사다 보니 법을 인문학적으로 이해하고 시민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책을 읽고 펜대를 들었다.

박형남 판사가 <더팩트> 취재진과 인터뷰 중 신작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동률 기자
박형남 판사가 <더팩트> 취재진과 인터뷰 중 신작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동률 기자

새해를 맞는 박 판사의 마음은 두 갈래다. 35년 동안 큰 잘못 없이 판사로서 일한 자신에 대한 대견함과, 시민과의 소통을 향한 기대감이다. 차기작도 구상 중이다. 박 판사는 "한국이 단기간 민주화·산업화를 이룬 격동의 시기를 거칠 때 사법부와 판사는 얼마나 기여했는지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책을 쓰고 싶다"라며 "공부할 것도, 고려해야할 것도 많아 먼 미래다. 그때까지 제 건강이 뒷받침해줄지, 총기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시민과의 소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경남 김해의 한 도서관에서 주최한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서 독자와 만났다. 다른 작가보다 열 개 이상의 질문을 더 받았다. 판사만 시민과의 소통에 목마른 게 아님을 실감했다. 박 판사는 행사에서 '작가 겸 판사'로 불렸다. "너무 좋더라고요. 저를 작가라고 해주니까." 영국 철학자의 책에 가슴 뛰었던 40여 년 전 책방 청년은 수줍게 웃었다.

작가라는 말에 절로 미소를 짓는 4년차 작가지만, 30여 년 판사 삶은 배움의 연속이었다.

"누군가 '당신 어떻게 34년 동안 재미없는 재판하면서 버텼냐'고 묻더군요. 제가 법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붕 떴을 것 같아요. 공리공론과 망상만 많이 했을 텐데 법률가 일을 하니 현실도 보며 조화된 삶을 살 수 있었죠. 인문학은 하늘의 구름을 찾는 것인데 법은 땅 위에 세워져있기 때문입니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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