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변론·일방 사임에 항의 방문했다 법정에…배심원 만장일치 무죄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변호사의 부실한 사건 처리에 반발해 사무실에 항의성 방문을 했다가 고소당한 성범죄 피해자가 국민참여재판으로 혐의를 벗었다. 배심원은 밤을 꼬박 새워 만장일치로 무죄 평결을 내렸고, 법원은 변호사를 질타했다.
14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선일 부장판사)는 최근 국민참여재판을 열어 배심원단의 만장일치 평결대로 30대 여성 A 씨와 모친 B 씨, 삼촌 C 씨, 이들의 지인 D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들은 폭력행위처벌법상 공동폭행 등 혐의로 기소됐다.
◆성범죄 가해자 역고소에 시작된 악몽
A 씨는 자신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에게 '역고소'를 당하면서 민·형사재판에 휘말리게 됐다. 그는 2017년 11월 E 변호사를 선임했다. 가해자이자 피고소인은 A 씨의 대학원 지도교수였다.
가해자는 2년 뒤 A 씨를 명예훼손·무고 혐의로 추가 고소했다. 가해자의 추가 고소는 A 씨와 E 변호사의 갈등으로 번졌다. A 씨가 추가 고소건 관련 의견서 작성을 요청했으나 E 변호사는 거절했다. A 씨가 거듭 요청하자 E 변호사는 인턴에게 일을 맡겼다. 의견서 초안 일부는 A 씨의 생각과 달랐고 오기도 있었다. 이에 A 씨는 E 변호사에게 항의했지만 돌아온 건 변호인 사임 의사가 담긴 우편물이었다.
A 씨는 E 변호사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다며 수임료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E 변호사는 그동안 변론 비용이라며 1270만 원의 착수금 중 400만 원만 줄 수 있다고 맞섰다. A 씨는 2019년 3월 29일 모친과 삼촌, 지인 1명과 사무실을 방문했으나 사무장은 E 변호사가 상담 중이라며 돌려보냈다. 이후 A 씨 일행이 4월 2일 오전 10시 29분께 다시 방문하면서 일이 터졌다. A 씨는 E 변호사 방문을 막아선 사무장을 밀치고 방에 들어갔다. E 변호사는 A 씨 등이 사무실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경찰에 신고한 상태였다. A 씨 일행은 경찰 지휘 아래 오전 10시 44분경 사무실에서 나왔다. E 변호사는 A 씨 일행을 고소했다.
◆피고인이 된 피해자 손 든 배심원
A 씨 일행은 폭력행위처벌법상 공동폭행·공동주거침입,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됐다. 국민참여재판 배심원 7명은 만장일치로 무죄 평결을 냈다. 배심원 평결은 법적 구속력이 없어 재판부가 다른 판결을 선고할 수 있다. 다만 재판부 판단도 배심원과 같았다. 판결문은 E 변호사에 대한 질타로 채워졌다. 부실한 사건 처리로 쌓인 오해를 풀기는커녕 감정적 대응을 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A 씨 일행이 사무장을 밀치고 방에 들어간 이상 범죄 구성요건은 충족하지만 '사회통념상 허용되는 테두리' 안이라고 봤다. A 씨의 상황을 볼 때 '사회상규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다'라고 볼 수 없다는 이유다. 재판부는 "피고인으로서는 의견서 초안에 오류가 있는 등 여러 의심스러운 사정으로 E 변호사의 업무 수행에 의문을 품게 됐다. 민사사건이 한창 진행 중 E 변호사가 계약 해지를 통보해 피고인은 곤란에 빠지기도 했다"며 "E 변호사는 오해가 있다면 푸는 대신 감정적으로 대응해 갈등을 불렀다"고 꼬집었다.
신체적 약자인 A씨 일행이 위력을 행사할 고의도 없었다고 봤다. A 씨의 모친 B 씨는 환갑을 넘긴 노인, 삼촌 C 씨는 50대 후반 작은 체구의 중년 남성이다. 이들의 지인 D 씨는 60대 여성으로 휠체어를 타는 중증장애인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에게는 단지 돈이 아니라 성의 있는 해명과 사과를 요구할 목적도 있었다"며 "E 변호사도 굳이 대면을 피할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 어렵다. 피고인 면담 요구를 스토킹처럼 취급할 수 없다"라고 짚었다.
A 씨의 수임료 반환 요구에는 "피고인 요구가 터무니없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법률 전문가가 아닌 피고인에게 판단 책임을 떠넘기는 건 부당"하다고 봤다. 이어 "피고인은 단지 변호사를 대면해 직접 상의하고 문제를 마무리 짓기를 원했을 뿐이다. 일련의 사건은 우연히 발생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변호사 사무실에 항의성 방문을 했다가 고소당한 의뢰인에 대해 국민참여재판 배심원은 만장일치 무죄 평결을 내렸다. 사진은 영화 '배심원들'. /더팩트 DB |
◆새벽 2시 반까지 재판…일부 배심원 '출근 걱정'
재판은 9일 오전 11시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 2시 반에 끝났다. 평결 직전 한 배심원은 "출근해야 한다"라고 토로했다. 결원을 대비해 자리한 예비 배심원도 새벽까지 법정을 지켰다. 재판부는 "이런 뭐 같은 경우가 있나 하실 수 있지만 끝날 때까지 자리해달라"라고 타일렀다. 모두가 지친 가운데 무죄 평결과 선고가 이어졌고 A 씨는 모친과 부둥켜안고 울었다.
국민참여재판은 국민이 배심원으로 형사재판에 참여하는 제도다. 대법원은 배심원이 심리 전 과정에 참여해 만장일치 의견으로 무죄 평결을 내리고 재판부 역시 그대로 채택했다면 2심에서 '명백히 반대되는 사정이 나타나지 않는 한' 존중될 필요가 있다고 판시한다. 항소 기한은 선고일로부터 일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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