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된 임종헌(사진)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6일 재판에 전 인사모 회원이 증인으로 나왔다. /이덕인 기자 |
후배 데려오면 "앞길 망친다"는 말이 나온 배경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국민과 소통하는 열린 법원.'
2016년 3월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에서 나온 문건 매 페이지마다 상단에 새겨진 문구다. 훈훈한 문구와 달리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에게 인사 불이익을 가하겠다는 어두운 내용이 담겼다. 이 무렵 연구회 내 소모임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에서는 법원행정처에서 프락치를 심어 두고 핵심 회원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최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부(윤종섭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 사건 공판에는 2015년 인사모에서 활동한 류영재 대구지법 판사가 증인으로 나왔다.
류 판사는 2015년 9월 인사모에 가입해 같은 해 12월 탈퇴했다. 탈퇴 이유로는 "저와 관련된 다툼이 있어서"라고 했다. 누군가 류 판사를 법원행정처의 프락치로 지목해 갈등이 생긴 것이다.
"사적인 얘기인데 인사모 회원 중 한 명이 제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내지 차장이었던 피고인(임 전 차장)의 프락치여서 인사모 얘기를 다 전달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제가 너무 화가 나서 인사모 회원들과 싸웠고 사실상 탈퇴하게 됐습니다."
◆"여기, 누군가가 임종헌의 프락치다"
류 판사는 서울중앙지법 등에서 임 전 차장과 함께 근무한 친분이 있었다. 인사모 회원은 애초 왜 임 전 차장이 인사모에 프락치를 심어 뒀고, 그 프락치가 류 판사라 생각했을까. 사법농단 연루 법관의 공소사실과 재판 내용을 종합하면 양승태 대법원은 우리법연구회에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근무하며 대법관 임명 제청을 눈앞에 둔 2003년, 몇몇 법관들이 기수와 서열에 따른 경직된 대법관 임명 제청 문화에 제동을 걸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그 해 인사에서 특허법원장에 만족해야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면전에서도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이 법관들은 대부분 우리법연구회 소속이었다.
돌고 돌아 사법부 수장이 된 양 전 대법원장의 트라우마는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소모임 인사모에 발동했다. 우리법연구회 출신 법관이 다수 있었고, 자신의 숙원 사업인 상고법원 도입도 비판하는 '눈엣가시' 모임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임기 내 인사모를 '해결'해야 한다 생각했고 임 전 차장은 그 뜻대로 움직였다는 것이 공소사실이다. 새로운 제도가 늘 그렇듯 인사모 회원 모두가 상고법원을 반대한 건 아니었다. 류 판사는 상고법원 도입에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인사모의 한 회원이 '임 전 차장이 프락치를 심어 뒀고 그 프락치가 류 판사다'라는 의심을 하게 된 배경이다.
◆가입하면 앞길 망치는 어떤 모임
인사모를 감싼 흉흉한 소문은 프락치만이 아니었다. 인사모에서 두각을 나타낼수록 대법원장 눈 밖에 나 인사 불이익을 당한다는 말도 돌았다. 류 판사 역시 후배를 가입시키고 싶다고 했다가 '잘 나가는 판사 앞길 망치치 말라'는 말을 같은 회원에게 들었다. 그러나 류 판사는 실제로 대법원에서 그렇게까지 할리 없을 거라는 생각에 지나친 피해의식으로 여겼다고 한다.
"사실 인사모 내에서 법원행정처가 견제한다, 대법원에 찍힐 것이고 여러모로 불이익이 있을 거라는 인식이 전반적으로 퍼져있을 때였습니다. 법원행정처 견제와 인사상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나 끌어들이면 나중에 그 사람 앞길을 제가 책임질 수 있냐는 그런 생각이었던 듯합니다."
류 판사가 피해의식으로 치부한 법원행정처의 작업은 실체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 이날 공판에서 공개된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의 2016년 3월 문건 '국제인권법연구회 대응방안'에는 핵심 회원에게 선발성 인사를 하고 해외 연수에도 불이익을 줘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프락치도 있었다.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을 지낸 이규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전직 회장임에도 임 전 차장과 함께 모임을 와해하려 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사법농단 사태의 한 축은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를 시도하고, 소속 회원에게 인사 불이익을 가했다는 의혹이다. 사진은 대법원. /남용희 기자 |
◆법관의 독립을 논하는 이유
임 전 차장 측은 국제인권법연구회와 같은 전문분야 연구회를 개편하는 과정이었다는 입장이다. 대법원 예산, 즉 세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주제와 벗어난 활동을 하는 연구 모임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인사모는 모임 이름대로 사법제도를 연구했다. 연구의 뿌리는 법관의 독립이었다. 변호인은 류 판사에게 법관 독립을 연구하는 인사모가 국제인권법이라는 연구회 주제에 부합하는지 물었다.
류 판사: 전문분야 연구회에서 법관 독립을 의식적으로 (주제로) 넣은 연구회는 없습니다. 국제인권법연구회도 간접적으로, 오해를 해서 넣은 게 아닙니다. 국제인권법이라는 분야 안에 법관 독립이 들어가 있습니다. 의료법 분야(연구회)에서 사법부 독립을 다루는 게 건너 건너가는 거라면 헌법이나 국제인권법연구회에서는 바로 하는 겁니다.
변호인: 그러니까 증인은 사법부 독립이나 법관 독립이 결국 국제인권법이나 헌법연구회에서는….
류 판사: 직접 연구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중략)
변호인: 법원에서 예산을 지원해주는 건 재판에 필요한 전문성을 기르고 자료를 공유하라는 의미라는 것에 동의합니까?
설령 주제에 맞는 연구라 한들 대법원 예산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냐는 물음이다. 류 판사는 말했다.
"변호사님도 재판하시면 알겠지만 지식뿐 아니라 판사가 재판하는 구조와 환경도 중요합니다. 사법농단이 범죄인지 아닌지와 별개로 국회나 이런 곳에서 재판에 개입할 수 있다면 변호사님도 불안하실 겁니다. 이 분야(법관 독립) 연구하는 게 재판 발전, 실무적 지식에 도움 되는 영역이 아닌 우회적이고 이상주의적 영역이라 국민 세금을 낭비하는 결과가 된다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임 전 차장의 재판은 12일 오전 10시에 이어진다.
ilraoh@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