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법조인 재판만 법대로…'인권교과서'된 양승태·김학의 사건
입력: 2021.06.20 00:00 / 수정: 2021.06.20 00:00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10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보석 허가를 받은 뒤 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이날 오전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혐의로 기소된 김학의 전 차관의 상고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파기환송하고 보석도 허가했다. /의왕=임세준 기자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10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보석 허가를 받은 뒤 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이날 오전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혐의로 기소된 김학의 전 차관의 상고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파기환송하고 보석도 허가했다. /의왕=임세준 기자

비판받는 법원의 선택적 정의…누구를 위한 형사소송법?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어떤 재판의 피고인은 재판부가 바뀌자 증거조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해 약 두 달 동안 증인신문 녹음만 들었다. 비슷한 시기 열린 또 다른 재판의 피고인은 대법원판결로 다시 재판을 받게 됐다.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증인이 사전에 검찰을 면담한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검찰이 증인을 회유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었지만 대법원은 '검사의 회유나 압박이 없었다는 증거를 대라'며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사법농단' 사태의 핵심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별장 성 접대' 의혹을 받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재판 이야기다. 공교롭게도 전직 고위 법조인 사건에서 '정석 재판'이 진행되며 법조계 안팎으로 잡음이 크다.

◆법원이 이렇게 충실하게 재판했었나

언뜻 보기에 무리한 요구로 보이지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주장은 법적 근거가 있다.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은 최근 재판부 구성원이 모두 바뀌었다. 형사소송법 301조는 판사가 교체되면 이전 공판 절차를 갱신하도록 규정한다. 대법원 형사소송규칙 144조 1항 5호는 갱신 전 다뤄진 증거도 다시 조사해야 한다. 다만 앞선 증거조사에 큰 하자가 없으면 공소사실에 대한 검찰과 피고인 양측의 입장을 듣는 것으로 갈음하는 것이 현실이다.

양 전 대법원장 측은 '현실'과 달리 법과 원칙에 따라 증거조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핵심 증인인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강형주 전 법원행정처 처장,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한승 전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의 증언 녹음을 꼬박 두 달, 주 2~3회 열리는 재판 내내 재생했다.

양 전 대법원장처럼 실현되지는 못 했지만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역시 최근 법과 원칙에 입각한 절차 진행을 주장했다. 그의 변호인은 형사소송법 292조 1~2항에서 증거를 '낭독'하도록 규정한다며 요지를 요약해 고지하지 말고 증거 내용을 낭독하는 형태로 서증조사가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292조 3항은 필요에 따라 요지만 고지해도 괜찮다고 규정한다. 대부분 재판의 증거조사는 이에 따라 진행된다. 임 전 차장 사건 재판부 역시 292조 3항을 근거로 '요지 고지만으로도 합법적'이라며 낭독 요청을 거부하자, 변호인은 그날 조사가 예정된 증거를 모두 부동의했다.

양승태(사진) 전 대법원장 등 사건 재판은 최근 두 달간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강형주 전 법원행정처 처장,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한승 전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의 증언 녹음을 주 2~3회 열리는 재판 내내 재생했다. /이선화 기자
양승태(사진) 전 대법원장 등 사건 재판은 최근 두 달간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강형주 전 법원행정처 처장,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한승 전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의 증언 녹음을 주 2~3회 열리는 재판 내내 재생했다. /이선화 기자

◆법원이 이렇게 든든한 방패막이었나

사법농단 재판에서 발견된 또 다른 '재판의 정석'은 검찰 수사의 위법함을 빈틈없이 지적했다는 점이다. 사태에 연루된 법관 중 한 명인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의 1심 재판부는 검찰의 피의자신문부터 압수수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꼼꼼하게 들여다봤다. 그 결과 피의자를 위축시키거나 영장 범위를 벗어난 압수수색 정황이 발견됐다.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 변호인의 필기를 제한해 위압감을 주거나, 법원이 발부한 영장에는 '2015후2204', '15후2204'만 검색하라고 적혀 있음에도 '2204' 등 일부 숫자만 검색해 영장 범위를 벗어난 수색을 벌였다는 지적이다. 관련 증거는 모두 증거 효력을 잃었고 유 전 연구관은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아 대법원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검찰의 부적절한 '관행'이 도마 위에 오른 일은 김 전 차관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법원은 최근 김 전 차관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벌금 5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 김 전 차관에게 5000만 원 이상의 뇌물을 건넨 것으로 조사된 사업가 최모 씨의 증언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이유였다.

검찰은 법원 출석 전 두 차례에 걸쳐 최씨를 면담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법원은 면담 직후 증인신문에서 최 씨의 증언이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취지로 구체화됐다며 검찰이 면담 과정에서 최 씨를 회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검찰이 파기환송심에서 최 씨를 회유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지 못하면, 유 전 연구관의 피의자신문조서와 마찬가지로 최 씨의 증언도 효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대법원 출입구에 자유, 평등, 정의가 새겨져 있다. /남용희 기자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대법원 출입구에 '자유, 평등, 정의'가 새겨져 있다. /남용희 기자

◆선택적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공판 갱신과 증거조사를 철저히 하자는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의 주장, 검찰의 위법한 관행을 지적한 유 전 연구관·김 전 차관 사건 재판부의 판단은 모두 법과 원칙을 충실하게 따른 '교과서'다. 문제는 법원이 모든 재판을 교과서대로 진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법조계에서는 일부 사건만 정석대로 진행되며, 공판중심주의나 직접심리주의 등 형사재판에서의 원칙이 정의가 아닌 특혜로 퇴색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관 업무 과중 등 대다수 사건에서 형사소송 원칙을 고수하기 힘든 사법부 현실도 개선해야 한다는 제언도 많았다.

이필우 변호사(법무법인 강남)는 "실제 증언과 공판조서 내용에 차이가 있다거나 특별한 경우가 아닌데도 증거조사를 모두 다시 하고, 많게는 수만 장에 달하는 증거를 일일이 낭독하자는 주장은 한국 사법체계에서 수용하기 어렵다"면서도 "형사소송법에 입각한 재판 진행이 강조되고 주목받는 건 바람직하다. 다만 법관들에 대한 재판뿐만 아니라 모든 재판에서 형사소송법 절차가 잘 수용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청한 법학과 교수 역시 "한 사건에서만 지켜지는 정의는 정의라 할 수 없다"며 "대다수 사건에서 공판중심주의가 지켜지지 못하는 사법 행정적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반인 재판이더라도 검찰권 남용에서 피고인을 보호할 방패막 역할도 더욱 충실히 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익명을 요청한 한 인권 변호사는 "사회적 주목도가 높은 사건에는 수사 검사도 재판에 나오기 때문에 수사 과정을 놓고 공방할 수 있지만 일반 시민의 사건에서는 공판 검사만 나와 기계적으로 재판을 진행하기 때문에 수사의 위법성을 주장할 기회가 흔치 않다"며 "주장하더라도 사회적 주목도가 높은 사건과 그렇지 못한 사건에서 재판부 반응의 온도 차가 크다"고 토로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수사 위법성을 지적하는 판례는 유명 사건에서 나오는 경향이 있다. 유명 사건의 경우 유의미한 판시를 내놨을 때 널리 참고할 수 있다는 의의가 있지만, 법원의 보호가 더 시급한 건 일반 시민"이라며 "시민이 당사자인 재판에서도 조서나 공소장에 문제가 없는지 적극적으로 심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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