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논리'로 판결한 강제징용 사건 재판부
입력: 2021.06.09 05:00 / 수정: 2021.06.09 11:02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최대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법원이 각하 판결을 내렸다. 사진은 지난 2017년 인천 부평공원에 설치된 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 /이덕인 기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최대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법원이 각하 판결을 내렸다. 사진은 지난 2017년 인천 부평공원에 설치된 '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 /이덕인 기자

6년 걸린 日 기업 상대 손배소, '소각하' 판결문 보니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최대 규모 손해배상 소송에서 법원이 각하 판결을 내려 논란이 크다.

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이유로 소송을 청구할 권한이 없다고 판단했다. 만약 원고 승소로 판결해 국제재판을 받으면 사법 신뢰와 국가 위신이 추락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청구권협정 효력을 부정하면 국격이 떨어진다는 논리는 박근혜 정부가 강제징용 사건 재상고심에 개입한 근거이기도 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전날(7일) 강제징용 피해자 송모 씨 등 85명이 일본제철 주식회사 등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측 청구를 각하했다. 재판부의 각하 판결 근거는 두 개의 국제조약이다. 재판부는 청구권협정 내용 가운데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등의 내용을 들어 "개인청구권이 완전히 소멸되거나 포기됐다고 보기 어렵지만 한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송권을 행사하는 건 제한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는 비엔나협약에 근거해 식민지배 불법성을 이유로 국제 조약의 효력을 깰 수 없다고 봤다. 비엔나협약은 국제관습법 등을 성문화한 것으로 이번 판결에서는 '모든 조약은 당사국을 구속하며 성실하게 이행돼야 한다'는 26조와 '어느 당사국도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 방법으로 국내법 규정을 원용해서는 안 된다'는 27조가 크게 작용했다. 재판부는 두 조항을 들어 "한국은 여전히 국제법적으로 청구권협정에 구속된다"며 "식민지배 불법성과 징용의 불법성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국내법적 법 해석으로, 이러한 사정만으로 조약에 해당하는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ICJ 가면 신뢰 추락"…일본과 관계 악화→한미동맹 걱정

재판부는 만약 원고 승소 판결이 확정돼 손해배상이 집행된다면 일본 정부에서 청구권협정 위반을 문제 삼아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회부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한국 역시 국제사회의 일원인 이상 이러한 압박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라며, 만약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패소한다면 한국의 위신과 사법부 신뢰에 큰 손상을 입게 될 거라 우려했다. 재판부는 "한국 사법부 판결, 특히 최종심인 대법원 판결이 국제재판 대상이 되는 것 자체만으로 사법 신뢰에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지만, 패소한다면 사법부 신뢰에 치명적 손상을 입게 될 것"이라며 "이제 막 세계 10강에 들어선 한국의 문명국으로서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라고 판결문에 적시했다.

이러한 재판부의 우려는 한미동맹까지 번진다. 재판부는 "여전히 분단국의 현실과 세계 4강의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상황에 놓인 한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 세력의 대표국가 중 하나인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될 것"이라며 "이는 결국 한미동맹으로 우리 안보와 직결된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으로까지 이어져 헌법상 안전보장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고 관측했다.

◆"개망신 안 되도록 하라"던 박근혜 정부 '데자뷔'

이번 판결은 2018년 10월 강제징용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재상고심 판례와 상반된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대법 판례를 인용하며 "국내 최고재판소의 판결이지만 식민지배 불법성과 징용 불법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청구권을 인정한 판결은) 단지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닮은 데도 있다. 2018년 대법 전원합의체 가운데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은 "청구권협정에 따라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이 제한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반대의견을 달았는데, 이번 판결의 논리 구조 역시 유사하다.

당시에도 강제징용 사건은 '국가 위신'과 연결됐다. 차이가 있다면 법원이 아닌 정부에서 나온 우려라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는 박정희 정권 때 체결한 청구권협정 취지를 유지하기 위해 배상 청구권을 인정해선 안 된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김규현 외교안보수석의 업무수첩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12월 김 수석에게 전화해 강제징용 사건을 언급하며 '개망신이 안 되도록 하라. 세계 속 한국이라는 위상을, 국격이 손상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처리하라'고 말했다. 이러한 '우려'는 2017년 촉발된 '사법농단' 의혹 수사로 드러났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전날(7일) 강제징용 피해자 송모 씨 등 85명이 일본제철 주식회사 등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측 청구를 각하했다. /이새롬 기자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전날(7일) 강제징용 피해자 송모 씨 등 85명이 일본제철 주식회사 등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측 청구를 각하했다. /이새롬 기자

◆법조계 "3·1 운동 정신 계승한 헌법 무시"

재판부는 선고 직후 보도자료를 내 "법원은 헌법기관으로서 헌법과 국가, 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이러한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후폭풍'은 거세다. 법조계에서는 헌법과 법률에 따라 판단해야 할 법원이 국가 위신과 외교·안보까지 판결에 끌어들인 건 적절하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은 8일 공동논평을 내고 "재판부는 노골적으로 (소각하) 판결이 야기할 정치·사회적 효과 때문이라는 점을 고백했다"며 "이는 사법부가 판단 근거로 삼을 영역이 아니며, 비본질적·비법률적 근거를 들어 판결을 선고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3·1운동의 정신을 이은 헌법이 건재한 상황에서 한국 법원이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국내법적 사정'으로 축소한 것이 아쉽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했다"고 명시돼 있다. 송기호 변호사(법무법인 수륜아시아)는 "법관은 기본적으로 헌법 원칙에 맞게 법을 적용하고 해석하는 사람인데, (이번 판결은) 3·1 운동 정신을 계승했다고 명문화해 일본 식민지배 불법성을 전제한 우리 헌법 정신을 무시했다고 볼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익명을 요청한 국제법 교수는 "지금도 국제사법재판소에 수많은 당사국이 있고 승패가 갈리는데, 패소한 국가가 판결문에 나타난 내용처럼 국격의 손상을 입는다는 건 국제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문명국'이라는 단어 역시 제국주의 시대를 벗어난 근·현대에는 문제 소지가 있어 잘 쓰지 않는 표현"이라고 꼬집었다. 또 이 교수는 "전쟁범죄 사건의 경우 오히려 가해 국가의 만행에 많은 관심이 쏠리기 때문에 한국에 유리한 측면도 있다"고 강조했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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