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부 침입 아니라도 평온 침해"…벌금 70만 원[더팩트ㅣ송주원 기자] 헬스장 여성 탈의실 입구 앞을 서성여도 방실침입죄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탈의실 안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도 여성용 공간으로 명확히 분리돼 있고, 입구 앞에 서있는 남성을 본 탈의실 이용자가 놀라는 등 '평온'이 침해됐다는 이유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50부(고연금 수석부장판사)는 방실침입 혐의로 원심에서 벌금 70만 원을 선고받은 60대 남성 A 씨의 항소를 지난달 31일 기각했다.
A 씨는 지난해 1월 서울의 한 헬스장에서 관리인의 제지에도 여성 탈의실 입구에 침입한 혐의를 받았다. A 씨는 헬스장 주차장에서 한 여성 운전자 차량이 자신의 차를 막고 있는 것을 보고 항의하기 위해 여성 탈의실을 찾아간 것으로 조사됐다. 수사기관 역시 처음에는 성범죄 가능성을 염두에 뒀으나 A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방실침입죄만 적용했다.
1심 재판부는 "관리인에게 여성 탈의실을 고지받았고 입구 밖에서도 탈의실 안 옷장이 보여 입구 밖 공간이 여성 탈의실임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음에도 들어갔다는 점에서 죄질이 좋지 않다"며 벌금 70만 원을 선고했다.
다만 1심은 "헬스장 이용 뒤 출근하려던 상황의 A 씨가 여성 운전자의 차량 때문에 차를 뺄 수 없게 되자 여성탈의실에 진입했을 뿐 성적 욕망 만족을 목적으로 침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며 "탈의실 내부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입구만 통과해 옷장 너머 여성 운전자를 찾으려 1~2초가량 진입했을 뿐이고, 관리자 역시 '출근해야 하는데 얼마나 급했겠느냐. 이해는 된다'고 진술하는 등 처벌 의사가 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에 A 씨는 "여성탈의실인 줄 모르고 입구에 한 번 들어갔다가 나왔고 관리자 안내를 받은 뒤에는 탈의실 입구 바로 앞에 서 있었을 뿐 재차 들어가지 않았다"며 항소했다. 앞서 수사기관은 A 씨의 행위를 크게 △관리인 제지 전 침입 △관리인 제지 뒤 침입으로 나눠 기소했다. A 씨는 관리인 제지 전 침입한 사실만 기소된 것으로 착각해 공소사실을 인정했다며 관리자 제지를 받은 뒤에는 입구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항소심 재판과정에서 제시된 사건 당시 폐쇄회로(CCTV) 영상에는 A 씨가 관리인의 제지를 받은 뒤 여성 탈의실 쪽으로 몸을 돌려 '이동'한 움직임만 포착됐다. A 씨가 몸을 돌려 이동한 공간은 CCTV에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A 씨 측은 이 사각지대는 여성 탈의실 입구 앞에서 서성인 것으로 입구 안에 들어간 건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관리인 제지 뒤 재차 들어간 사실이 없다'는 A 씨의 기억이 정확하다고 볼 수 없고, CCTV와 목격자 진술 등을 종합했을 때 A 씨의 주장을 믿기 어렵다며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2심은 "관리인의 제지를 받고도 그곳을 벗어나지 않은 채 자신의 몸을 여성 탈의실 입구 쪽으로 돌려 이동한 사실은 분명하다"며 "이는 관리인 제지 직후 여성 탈의실에서 나왔다는 피고인의 주장과 상반된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A 씨 스스로 인정하듯 자신의 차량이 가로막혀 화가 나 상당히 흥분한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 관리인 제지를 받고 입구 바깥쪽에만 서 있었는지, 아니면 신체 일부라도 입구 안쪽으로 들어갔는지 A 씨의 기억이 정확하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탈의실 안에서 A 씨를 목격한 여성 역시 "사물함 앞에서 옷을 입으려고 서 있었는데 남자가 탈의실 입구로 잠깐 몸을 들이밀었다가 직원 제지로 나가는 듯했으나, 바로 다시 들어와서 마주치게 됐다. 소리를 지르고 바로 안쪽으로 피신했다"는 자필 진술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성은 경찰에 출석해서도 일관된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재판부는 이처럼 탈의실 이용자가 A 씨를 보고 놀란 이상 탈의실 안에 침입하지 않았더라도 '주거의 평온'을 해쳤다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또 여성 탈의실 입구 앞 공간 바닥에는 여성 탈의실 안쪽 바닥과 같은 바닥재가 깔려 있고 검은색 테이프로 구역이 구분돼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대법원은 방실침입이 규정된 형법상 주거침입 범죄에 대해서 '주거의 평온 침해'를 유·무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또 건조물침입죄에 대해서는 건조물 자체가 아닌 물리적으로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된 공간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재판부는 "관리인 제지 뒤에도 여성 탈의실 입구에 서 있던 A 씨를 보고 탈의실 이용자가 놀란 이상 주거의 평온이 침해됐다고 봐야 한다"며 "설령 A 씨가 여성 탈의실 출입문 안쪽이 아니라 입구 앞 공간에 있었더라도 바닥재 등으로 명확하게 구분된 공간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여성 탈의실에 침범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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