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첫 유죄' 그후…양승태 재판 재시동
  • 송주원 기자
  • 입력: 2021.04.07 05:00 / 수정: 2021.04.07 05:00
사법농단 의혹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이 법관 정기 인사 무렵 중단된 지 두 달 만에 다시 열린다. /이선화 기자
'사법농단' 의혹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이 법관 정기 인사 무렵 중단된 지 두 달 만에 다시 열린다. /이선화 기자

2월 법관 정기 인사 뒤 두 달만[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사법농단' 의혹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이 법관 정기 인사 무렵 중단된 지 두 달 만에 다시 열린다. 그 사이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로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를 받았던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양형실장)은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또 다른 법관인 임성근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심판을 받게 되는 등 판세는 양 전 대법원장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이종민·임정택·민소영 부장판사)는 7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의 속행 공판을 연다.

양 전 대법원장 등 사건은 애초 재판장 박남천 부장판사와 배석인 심판 판사, 이원식 판사가 2019년 3월부터 2년 가까이 심리했다. 그러나 2월 법관 정기 인사에서 전원이 전보되면서 재판은 두 달가량 멈췄다. 정기 인사와 함께 양 전 대법원장 등 사건이 배당된 형사합의35부는 대등재판부로 개편됐다. 대등재판부는 법조경력 15년 이상의 부장판사 3명이 한 재판부에서 재판장과 주심을 번갈아 맡는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은 일선 법관이 당시 대법원 기조에 맞게 판결을 선고하도록 부당하게 개입하거나, 헌법재판소를 상대로 대법원 위상을 강화하려고 헌재 내부 정보를 빼돌린 혐의 등으로 2019년 2월 재판에 넘겨졌다. 대법원장이 기소된 건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재판 개입·헌재 정보 수집 등을 하도록 지시한 적이 없다거나, 설령 지시를 내렸어도 정상적인 사법행정 업무였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의혹에 연루된 법관이 줄줄이 무죄 판결을 선고받으면서 의혹의 정점인 양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판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특히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재판에 개입한 혐의를 받았던 임 전 부장판사에 대해 법원이 '재판 개입 행위는 사실이지만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서 이런 관측은 더 불거졌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 적용된 47개 혐의 중 41개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이기 때문이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란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 행사를 방해한 범죄를 말한다. 직무권한에 속하면서도 그 권한을 남용한 사정이 인정돼야 성립하는 범죄인데, 법원은 애초 헌법상 독립을 보장받는 재판에 개입할 직무권한이 없기 때문에 재판 개입 행위를 했어도 형사 처벌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런 논리에 따라 임 전 부장판사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헌재에서 재판 개입 행위의 위헌성을 따지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지시로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를 받았던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규진(사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양형실장)은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이덕인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지시로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를 받았던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규진(사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양형실장)은 유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이덕인 기자

그러나 최근 법원은 대법원·법원행정처에는 재판에 대해 '지적'할 직무권한이 있다는 다소 파격적인 판시를 내놨다. 이 전 기조실장·이 전 양형실장 사건 재판부는 '판사가 나태하고 미숙해 쟁점이 복잡한 사건 심리를 미루는 등 잘못된 재판을 할 때 이를 지적할 권한이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지적'에 그쳐야 한다며 재판 방식과 판결 방향을 제시하는 행위는 권한 남용이라고 봤다.

이에 따라 이 전 양형실장이 서울남부지방법원의 한정위헌 취지 위헌심판제청 결정을 무르도록 한 혐의는 유죄로 판단됐다. 이외에도 헌재 파견 법관을 통해 기밀에 부치는 정보를 수집한 혐의 등이 유죄로 판단돼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법관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도 처음, 재판 개입 행위를 직권남용죄로 처벌한 것도 처음이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 더 큰 복병은 따로 있다. 이 전 양형실장 사건 1심 판결문에 따르면, 법원은 그의 재판 개입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면서 양 전 대법원장·박 전 처장과 공모해 벌인 혐의라고 인정했다.

헌재 정보 수집 혐의 역시 이 전 양형실장이 대법원 부임을 앞두고 양 전 대법원장에게 '법원 관련 헌재 사건 내부 정보를 수집해 잘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은 점 등에 비춰 양 전 대법원장과 공모관계였다고 판단했다. 이외에도 박·고 전 처장의 공모관계도 인정했다.

의혹의 한 축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의혹 역시 유죄로 판단하고 양 전 대법원장의 공모관계도 인정했다. 국제인권법연구회와 그 소모임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은 양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 정책을 비판해 '와해 대상'이 된 것으로 조사됐다. 국제인권법연구회·인사모를 와해할 방안이 담긴 문건을 이 전 기조실장을 통해 보고받는 형식으로 공모했다는 취지다.

법원이 사법농단 의혹의 큰 줄기인 △재판 개입 △헌재 정보 수집 △인사모 와해 관련 혐의에서 공모관계를 인정하면서, 이날부터 재개될 양 전 대법원장 등 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법조계에서는 두 사건이 검찰 진술조서와 문건 등 사실상 같은 증거자료를 토대로 심리 중인 만큼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재판 결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관련 사건 재판에서 공모관계가 인정됐다는 이유만으로 판결을 예단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공소사실 유·무죄는 관련 사건 판결이 아닌 소송 당사자들의 변론과 증거만으로 좌우된다는 접근이 적절하다"며 "같은 사실관계를 놓고도 직권남용 법리 해석에 따라 유·무죄가 갈릴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ilraoh@tf.co.kr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이메일: jebo@tf.co.kr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