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양형실장)·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최근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3년,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덕인 기자 |
"재판권 행사 방해 없으면 직권남용 처벌 안돼"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사법농단' 사건에 연루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양형실장)·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최근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3년,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연루된 법관 중 첫 유죄 판결이다. 재판개입 행위를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다만 '실패한 재판개입은 처벌할 수 없다'는 선례도 남겼다.
이규진 전 실장 등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의 지시에 따라 옛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제기한 행정소송에 개입한 혐의를 받는다.
재판부는 대법원·법원행정처가 판사의 명백한 잘못을 '지적'할 권한은 있지만 그 이상의 개입은 사법행정권 남용, 즉 직권남용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헌법상 독립이 보장된 재판에 개입할 권한 자체가 없기 때문에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임성근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사건 1심 판결과는 결이 달랐다. 재판 개입 행위를 형사처벌할 길이 열린 셈이지만, 일부 혐의는 재판 개입 행위를 모두 사실로 인정하고도 무죄로 봤다.
판결문상 무죄로 판단된 혐의를 보면 이렇다. 이규진 전 실장은 2015년 5월 26일 조한창 당시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현 변호사)를 만나 통진당 소송에 대한 법원행정처 입장이 담긴 문건을 건네며 사건 담당 재판부에 전달해 달라고 말했다. 문건에는 특정 결론을 유도하는 내용이 담겼다. 조 전 수석부장판사는 고민을 거듭하다 문건을 파쇄했지만 법원행정처의 입장을 어느 정도 전하긴 했다. 2015년 여름 무렵 회식 자리에서 사건을 담당한 행정13부 재판장 반정우 부장판사(현 대법원 비서실장)를 만나 '각하는 법리적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신중하게 검토해서 결정하라'는 취지로 말한 것이다.
하지만 반 부장판사는 조 전 수석부장판사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반 부장판사가 이끄는 행정13부는 법원행정처 입장에 정면으로 반하는 '각하' 판결을 내렸다.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 대한 유죄 판결은,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연루된 법관 중 첫 유죄 판결이라는 점과 함께 재판 개입 행위를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판시한 점에서 괄목할만 하다. /남용희 기자 |
2016년 4월경 광주지법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임 전 차장은 2016년 3월경 이민걸 전 기조실장·이규진 전 양형실장이 참석한 실장회의에서 통진당 행정소송을 맡은 광주지법 행정1부에 법원행정처 입장이 담긴 문건을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이민걸 전 실장은 김광태 당시 광주지방법원장(현 서울고등법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통진당 행정소송은 법원행정처에서 관심 있는 사건이다. 법원행정처에서 검토한 문건이 있는데 이를 재판부에 전달해 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김 법원장은 '재판부에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며 거절했다.
이러한 내용을 보고받은 임 전 차장은 이규진 전 양형실장에게 임무를 넘겼다. 그는 광주지법에서 통진당 사건을 맡은 행정1부 재판장 박길성 부장판사(현 대전지법 부장판사)와 재판연구관으로 함께 근무한 이력이 있었다. 이러한 '친분'을 이용해 법원행정처 입장을 직접 전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이규진 전 실장에게 '청구기각 판결이 적절하다'는 권고를 들은 박 부장판사는 법원행정처 입장과 상반되는 청구인용 판결을 선고했다.
이 혐의들이 무죄로 판단된 이유는 재판 개입 행위가 없었거나, 적절한 권한 행사라서가 아니었다. 직권남용 행위는 분명 존재했고 부당한 권한 행사였지만, 일선 법관이 소신껏 판결을 선고했기 때문이었다.
"공무원의 직권남용 행위가 있었더라도 현실적으로 권리행사의 방해라는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성립을 인정할 수 없다. (…) 특정 사건의 재판사무를 담당하는 판사가 핵심 영역에 속하는 사항에 관해 아직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았는데 법원행정처가 먼저 그 판사에게 이러한 판단을 내리면 부적절한 판단일 수 있다고 지적하는 경우, 위 판사가 실제로 그 지적을 제쳐둔 채 자의로 재판을 했다면 사법행정권의 공정이라는 보호법익이 침해될 위험이 충분하다고 볼 수 없다. (…)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서 '권리행사방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본다." (이 전 기조실장·이 전 양형실장 등의 1심 판결문 중)
즉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 중 '권리행사방해'가 이뤄지지 않았고, 사법행정권의 공정성이라는 보호법익도 침해되지 않아 처벌할 수 없다는 판시다. 인사권을 쥔 법원행정처의 압박에도 재판의 독립을 지켜낸 법관들은 공교롭게도 가해자인 이 전 양형실장의 부담도 덜어준 모양새가 됐다. 다만 조 전 수석부장판사에 대한 직권남용죄는 인정됐다. 조 전 수석부장판사가 문건을 파쇄하면서도 법원행정처 입장의 핵심 내용을 반 부장판사에게 전하긴 했기 때문에 직권남용죄의 성립 요건 중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경우'가 충족됐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더팩트DB |
법원은 판사, 소송 관계자가 아닌 제3자가 개입한 재판은 '재판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재판에서는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정된 사실관계에 맞는 결론을 내리는 것, 즉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적었다. 이어 "해당 재판의 소송관계자와 담당 판사 이외의 제3자는 애당초 해당 재판의 증거를 접하기 어렵고 사실관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기에 구체적 타당성 있는 결론을 내릴 기초 자체가 마련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해당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 이외의 제3자가 마련한 방향에 따라 해당 재판의 판사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법원행정처 입장이 재판에 반영된 혐의사실은 유죄로 판단됐다. 이 전 양형실장이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 제청 결정을 한 서울남부지법 재판부에 연락해 결정을 바꾸도록 한 혐의가 대표적이다. 한정위헌 결정은 단순위헌과 달리 법원의 법률 해석의 위헌성을 지적하는 결정이다. 당시 대법원은 '헌재에서 법원 판단을 평가하게 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는 것이 공소사실이다. 재판부는 "설령 (법원행정처의) 권고에 따른 결정의 결론과 이유가 적정해도 재판의 독립에 비춰 그 재판은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사법행정권의 공정성이라는 보호법익이 침해될 위험도 충분하다"고 봤다. 다만 이러한 과정을 은폐하기 위해 결정문이 검색되지 않도록 전산상 '블라인드 조치'를 취했다는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블라인드 조치는 이 전 양형실장이 직접 요청한 사안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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