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공모' 처음 인정…사법농단 재판 전환점
입력: 2021.03.24 05:00 / 수정: 2021.03.24 05:00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이민걸·이규진 집행유예로 첫 유죄...임종헌 인사모 와해 책임도 물어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연루된 법관이 처음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양승태 대법원 시절 핵심 관계자였던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양형실장)과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3년,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윤종섭 부장판사)는 '사법농단 사태'를 이루는 큰 줄기인 △재판 개입 △헌법재판소 상대 위상 강화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관련 혐의를 대부분 유죄로 인정하고 부당함을 질타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공모관계를 처음 인정한 판결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사법농단 재판의 전개도 주목된다.

◆선배 조언이 아닌 '재판 개입'이다

이 전 기조실장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의 지시를 받고 옛 통합진보당 행정 소송에 개입한 혐의 등을 받는다. 이 전 양형실장 역시 헌재와 얽힌 재판에 여러 차례 개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특히 이 전 양형실장은 법률이 아닌 법률 해석의 위헌성을 따지는 한정위헌 결정을 막기 위해 이미 한정위헌 취지의 위헌 제청 결정을 한 재판부에 연락해 결정을 바꾸도록 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전산상 '블라인드 조치'를 취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태에 연루된 대부분의 법관은 공소사실상 재판 개입으로 적시된 연락이나 만남, 문건을 둘러싼 사실관계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다. 대신 '기억나지 않는다'라거나, 이러한 연락·만남·문건이 '부당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진술이 잇따랐다. 사회적 관심이 크거나 쟁점이 복잡한 사건에 대한 조언으로 생각했다는 이유다. 특히 '헌법 전문가'로 통한 이 전 양형실장의 재능은 충실한 방패막이 됐다. 임 전 차장도 이 점을 언급하며 지난해 6월 자신의 공판에 나온 염기창 부장판사에게 '헌법에 대해 평균 이상의 소양을 갖고 있느냐'고 직접 묻기도 했다. 이 전 양형실장의 연락에 결정 취지를 바꿨던 염 부장판사 역시 "개입이라기보다는 자문이나 조언을 얻은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날 재판부 역시 대법원·법원행정처에서 법관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다고 봤다. 다만 이는 법관의 업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장기 미제 사건을 방치하며 간단한 사건만 처리하는 등 '명백한 잘못'이 있으면 이를 지적하는 데 그쳐야 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재판 독립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법원장·법원행정처에서 판사를 상대로 어떠한 지적도 할 수 없다고 보는 건 불합리하다. 국민의 재판청구권 보장을 위해 나태한 판사에 대한 지적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면서도 "대법원장·법원행정처가 할 수 있는 건 판사의 명백한 잘못을 지적하는 데 그쳐야지, 사건을 특정 시점 전까지 처리하라거나 어떤 조처를 하라고 하는 권고를 할 수는 없다"라고 설명했다. 또 재판부는 소송 관계자가 아닌 '제3자'의 의견에 영향을 받은 판결은 타당성이 없고 "재판이라고 할 수도 없다"라고 강조했다.

법원은 양승태 대법원 시절 핵심 관계자였던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양형실장, 사진)과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3년,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 /이덕인 기자
법원은 양승태 대법원 시절 핵심 관계자였던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양형실장, 사진)과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에게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3년,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 /이덕인 기자

◆비공개 정보는 공유하면 안 된다

이 전 양형실장은 헌재를 상대로 대법원 위상을 강화하려는 당시 대법원 기조에 따라 헌재 내부 동향과 정책을 수집한 혐의 등을 받는다. 구체적으로는 재판연구관의 토론 내용과 결과, 평의(헌법재판관 전원 참석 회의) 회부 여부, 평의의 결과와 특정 연구관의 의중 등을 파견 법관을 통해 전달받았고 이를 보고서로 만들어 대법원 윗선에 보고했다는 혐의다. 파견 법관에 대한 인사 평정권이 법원행정처에 있다는 점을 이용해 파견 법관이 '스파이' 노릇을 하도록 했다고 검찰은 본다.

이 전 양형실장은 이를 '정보 공유'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5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그는 "대법원과 헌재는 자료 공유의식이 강하다. 변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법원 외부로 유출만 안 된다면, 적절한 건 아니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라고 해명했다. 파견 법관을 통한 정보 공유는 재판부 역시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법원은 헌재 결정을 존중하고 숙고하기 위해 헌재 결정 취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데, 이러한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할 사람이 필요해 파견 판사를 소통 창구로 둔 것"이라며 "대법원장·법원행정처는 헌재 결정 취지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파견 판사를 통해 자료를 전달받거나 요청할 권한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전 양형실장이 파견 법관을 통해 확보한 자료는 헌법재판소법상 '비공개 서면'이라고 판단했다. 자료 공유 자체는 가능한 일이지만, 공개하면 안 될 정보까지 공유했다는 지적이다. 재판부는 "아직 헌재 심판이 계속 중인 사건에 관해 특정 헌법연구관의 의견을 보고해 전달하거나, 헌법재판소법상 비공개 서면에 해당하는 내용을 보고하게 한 것은 헌법재판소법·파견 판사 제도 취지에 반한다"고 꼬집었다. 또 재판부는 이들 혐의와 관련해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 처장, 고영한 전 대법관의 공모관계도 인정했다.

이민걸·이규진 전 실장 등 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인사모 와해 의혹 관련 혐의에 대해 행정조직 운영자는 조직의 효율적 운영에 매달리느라 다른 의견을 장애물로 여기며 의견을 내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남용희 기자
이민걸·이규진 전 실장 등 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인사모 와해 의혹 관련 혐의에 대해 "행정조직 운영자는 조직의 효율적 운영에 매달리느라 다른 의견을 장애물로 여기며 의견을 내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남용희 기자

◆'인사모' 이름은 죄가 없다

이 전 기조실장 등은 판사들의 연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소모임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 와해 방안을 검토한 혐의도 받는다. 이들 모임은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 사법행정에 비판적 목소리를 낸 모임으로 조사됐다. 와해 의혹의 큰 축은 이른바 '중복가입 해소 조치'다. 중복 가입 상태인 판사는 한 연구회만 선택하도록 한 조치로, 스스로 정리하지 않으면 가장 먼저 가입한 연구회 회원 자격만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신생 연구회로 중복가입 회원이 많았던 인사모 규모를 줄이려는 조치로 검찰은 보고 있다. 이 전 기조실장은 지난해 5월 양 전 대법원장 등의 공판에 증인으로 나와 "2007년 정해진 예규(연구회 중복가입 금지)에 따른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런 주장을 모두 배척했다. 이 혐의에 대해서는 임 전 차장의 책임을 크게 봤다.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은 오랜 기간 국제인권법연구회·인사모 해소를 목적으로 삼아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고, 결국 중복가입 해소 조치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며 "양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 운영에만 매달려서 (인사모를) 반대 세력으로, 또 장애물로 여기며 그들의 의견에 마땅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의견을 내지 못하게 하려 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임 전 차장의 동기는 인사모 제재가 목적이었고 이는 위법·부당하다. 이 전 기조실장 역시 이를 알면서도 실장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고 판시했다.

임 전 차장 측은 지난해 10월 공판에서 '인권 보장'이라는 모임 이름을 문제 삼기도 했다. 당시 전문분야를 연구하는 법관 모임 구조를 정비하기 위한 논의가 이뤄졌는데, 유독 인사모 얘기가 주를 이뤘던 이유는 '인권'이라는 주제를 이탈해 사법행정을 논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날 재판부는 '인권법'이라는 이름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 보호·재판 독립과 국제인권법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판사에게 국제인권 규범에 대한 연구·토론은 꼭 필요하다"며 "이에 비춰 인사모 활동은 설립 목적에 반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이어 "행정조직 운영자는 조직의 효율적 운영에 매달리느라 다른 의견을 장애물로 여기며 의견을 내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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