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지나도 힘들다"…'간첩조작 피해자' 유가려의 눈물
입력: 2021.03.20 00:00 / 수정: 2021.03.20 00:00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유가려 씨가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국정원 고문 수사관 1심 속행 공판에 앞서 기자회견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시스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유가려 씨가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국정원 고문 수사관 1심 속행 공판에 앞서 기자회견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시스

"국정원서 맞고 허위 조서 작성했다" 증언

[더팩트ㅣ김세정 기자] 8년이 지났지만, 유가려 씨는 아직도 '합신센터'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지금은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라는 이름으로 바뀐 '중앙합동신문센터'.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들은 이곳에서 신원과 간첩 여부를 확인받는다. 센터 생활은 보통 한 달이면 끝나지만, 유가려 씨는 갖은 폭행과 협박에 시달리며 6개월을 보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 송승훈 부장판사는 19일 국정원법 위반 혐의를 받는 국정원 조사관 A, B씨에 대한 공판을 열었다. A씨와 B씨는 합신센터에서 유 씨에게 협박과 폭행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유 씨는 이날 증인으로 출석해 이들에게 받은 고문과 가혹행위를 증언했다.

증언대에 선 유 씨는 합신센터의 기억을 생생히 떠올렸다. 재북화교 출신인 유 씨는 오빠 유우성 씨의 도움으로 2012년 10월 제주도에 발을 디뎠다. 탈북자가 아니면 합신센터에 머무를 수 없지만 유 씨는 탈북자로 신분을 밝히고 센터에 들어갔다. 국정원은 조사 보름 만에 가려 씨가 재북화교라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유 씨를 계속 가뒀다.

2004년 먼저 입국한 오빠 유우성 씨는 서울시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3년 유우성 씨는 국내 탈북자 200여 명의 정보를 북한으로 넘겨준 간첩으로 몰려 체포됐다. 검찰 기소의 핵심 증거는 국정원이 확보한 동생의 진술이었다. 유가려 씨는 국정원 조사관들의 강요로 "오빠는 간첩"이라고 허위로 자백했다.

유가려 씨는 국정원 직원 A씨와 B씨의 이름을 모른다. 그저 '대머리 수사관'과 '아줌마 수사관'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매일같이 유 씨를 불러 오빠에 대해 캐물었다. 이날 열린 재판은 A씨와 B씨 변호인의 반대신문이 진행됐다. 떨리는 목소리로 법정에 선 유 씨는 "진술 전에는 먼저 말을 맞췄다. 그러다가 자기들(A씨와 B씨)이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면 플라스틱 물병으로 때리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 책상을 발로 찼다"며 "욕설과 함께 매를 맞으면서 조사받았다"고 재차 폭로했다.

국정원 직원 측은 센터에서 쓴 유 씨의 진술서를 제시했다. 변호인은 "증인이 작성한 진술서가 여러 가지 있는데 북한으로 하다가 어떨 때는 조선으로 하다가 또 공화국으로 지칭한다"며 "피고인들이 출력해서 받아쓴 대본이라면 북한에 대한 호칭을 이렇게 여러 가지로 표현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즉, 조사관이 준 대본대로 진술서를 작성했다면 북한에 대한 호칭이 달라질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유 씨는 "내가 맞으면서 쓴 것도 있고, 조사관과 말을 맞춰 쓴 것도 있고, 조사관이 알려줘서 쓴 것도 있다. 그래서 섞였다"며 "8년이 지났다. 그때 국정원에서 금방 나올 때는 다 말했는데 지금 물어보면 혼돈되고 생각이 안 난다. 양해해달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변호인은 유 씨가 그린 조사실 그림도 제시했다. 조사관이 프린터기로 출력한 대본을 유 씨가 받았다는 것인데 유 씨가 그린 조사실 배치도에는 프린터기가 없다고 지적했다. 변호인은 "그림을 보면 프린터기가 없다. 증인 진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면 출력해서 베꼈다는 것인데 피고인들이 어디서 프린터를 해왔는가"라고 물었다.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유가려 씨가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국정원 고문 수사관 1심 속행 공판에 앞서 기자회견 중 발언하고 있다. /김세정 기자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유가려 씨가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국정원 고문 수사관 1심 속행 공판에 앞서 기자회견 중 발언하고 있다. /김세정 기자

유 씨는 "조사실도 엄청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카메라가 없는 방에서 조사받다가 나중에는 카메라 있는 방으로 옮기고 수도 없이 옮겼다"며 "대체로 조사실 구조가 다 비슷한데 조사실을 옮겨 다녔다"고 했다.

거듭된 변호인의 추궁에 유 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유 씨는 "질문을 왜 그렇게 하는가. 국정원에서 금방 나와서 쓴 진술서는 지금 기억보다 상세한 내용"이라며 "왜 그렇게 나한테 질문을 하는가. 유도 신문하지 말라"고 격분했다. 유 씨는 증언대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오열했다. 유 씨의 눈물에 잠시 휴정하기도 했다.

유 씨는 A씨와 B씨가 자신의 목덜미를 잡고 전기고문을 하겠다며 협박했다고 밝혔다. 그는 "너무 맞아서 스스로 일어날 정도가 못됐다. 벽 모서리에 손을 짚고 기어 올라왔다"며 "정신 차리게 해준다며 전기고문실에 끌고 갔다. 조서를 보니까 내가 내 발로 갔다고 하는데 전혀 아니다. 들어가라고 밀었는데 들어가지 않았다"라고 했다.

거듭된 강요에 유 씨는 "오빠는 간첩"이라며 허위자백했다. 오빠 유우성 씨는 동생에게 접견 신청을 재차 했지만 만날 수 없었다. 유 씨는 이같은 국정원의 가혹 행위와 증언 강요를 2013년 오빠의 재판에서 폭로했다. 유우성 씨는 2015년 10월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가 확정됐다. 유우성 씨는 2019년 2월 국정원 직원들을 고소했지만 지난해 3월에야 기소됐다.

이날 법원을 찾은 유우성 씨는 재판 전 취재진에게 "8년이 지나도 저희 남매에게는 공포가 여전하다"며 "2013년 조작됐다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8년이 지나서야 기소돼고, 형사 재판이 시작됐다. 진실을 밝히는 길이 멀고도 길다"고 했다.


sejungki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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