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사진) 정부 당시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간첩 조작 피해자들이 최근 재심에서 잇따라 무죄 선고를 받았다. /더팩트DB |
'간첩 조작' 재심 무죄 잇따라…불법 체포·가혹 행위·접견 제한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1960~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간첩 조작 피해자들이 최근 재심에서 잇따라 무죄 선고를 받았다. 법원은 중앙정보부에서 가혹 행위를 당했다면 수사의 연장선상인 검찰에서의 진술도 증거 능력을 인정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김창형 부장판사)는 지난 18일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대표적 공안사건인 '고려대 NH회' 사건에 연루돼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노중선(80) 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2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손동환 부장판사)는 일가족이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른 오경대(81) 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 형 따라 나섰다가, 현장 실습 도왔다가 '간첩 누명'
두 사건 피해자들은 평범한 20~30대 청년이었으나 각각 대학생들의 현장 실습을 도왔다가, 서울에서 공부하는 형제를 따라나섰다가 간첩으로 몰려 가혹 행위를 당하고 감옥 신세를 졌다.
중선 씨는 고려대 부설 고대노동문제연구소에서 근무하던 1972년 7월 고려대 학생들이 '탄광에 현장 실습을 하러 가고 싶다'고 요청하자, 탄광 매점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부탁해 이들이 실습을 하러 갈 수 있도록 도왔다.
중앙정보부는 중선 씨가 'NH회'라는 지하 조직에 가입해 학생들을 탄광 노동운동에 투입하는 등 '모택동식 사회주의'를 표창했다며, 중선 씨를 연행해 가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영장 없이 임의동행 명목으로 중선 씨를 강제로 끌고 가 구금하고, 변호사는 물론 가족의 접견도 금지했다.
중선 씨는 5일 동안 수사관으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잠을 못 자게 하는 등 가혹 행위를 당한 끝에 허위 자백을 했고 재판에 넘겨졌다. 이듬해 11월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은 중선 씨는 상소를 거듭했으나 대법원에서도 형을 확정하며 옥살이를 해야 했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경대 씨는 1966년 6월 이복형 노경지 씨로부터 '무역 일을 배우자'는 제안을 받고 형과 함께 배를 탔다. 하지만 배에는 북한 방언을 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북한에 건너간 이복형이 경대 씨마저 북한으로 데려가려 한 것이다.
이복형은 격렬하게 저항하는 경대 씨를 풀어줬지만 다른 형제들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온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같은 해 8월 19일 다시 제주를 찾은 이복형은 동생들 중 한 명인 오경무 씨를 데려 갔다.
7개월 뒤 경대 씨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은 경대 씨와 형제들을 끌고 갔다. 수사관이 대는 혐의를 부인할 때마다 구타당한 경대 씨 형제들은 결국 간첩 혐의를 시인해야 했고, 1967년 4월 '반국가단체에 가입해 남파 간첩인 형과 연락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됐다. 경대 씨처럼 이복형에게 끌려갔던 경무 씨는 사형을 선고받아 그해 9월 형이 확정됐다. 경대 씨는 징역 15년형을 확정받아 1981년에야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지난 2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 심리로 열린 재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오경대(왼쪽에서 세번째) 씨와 변호인단이 무죄 선고를 축하하는 현수막을 들고 있다. /변호인단 제공 |
◆ 구타하고 가족도 못 만나게…법원 "임의성 없는 자백"
법원은 이들을 간첩으로 지목한 50여 년 전의 공소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두 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수사기관에서 받아낸 자백에 '임의성'이 없다는 것이 무죄 선고의 핵심이다. 당사자 진술 등을 종합할 때 수사기관의 체포와 구금은 불법이고, 구금한 뒤 고문과 가혹행위를 가해 얻어낸 자백으로서 증거 능력이 없다는 설명이다.
특히 두 사건 재판부는 중앙정보부에서 가혹 행위를 당했다면, 기관만 다를 뿐 수사의 연장 선상인 검찰 조사에서 한 자백도 임의성 없는 자백으로 위법수집증거에 해당한다고 공통되게 판시했다.
경대 씨 사건을 맡은 형사합의33부는 "피고인이 검사 이전 수사 단계부터 임의성 없는 심리 상태가 계속돼 동일한 내용을 자백했다면 검찰 조사단계에서 강요 행위가 없었더라도 검사 앞에서 한 자백도 임의성 없는 자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대법원 판례를 들었다.
중선 씨 사건을 맡은 형사합의29부 역시 "피고인이 중앙정보부에서 불법 구금돼 조사를 받으면서 가혹행위를 당한 점에 비춰, 비록 검사 앞에서는 가혹행위를 당한 일이 없어도 임의성 없는 심리 상태가 계속된 상태에서 자백한 것으로 의심된다"며 "그 임의성에 관한 의문점을 해소할 만한 검사의 증명도 없다"라고 봤다.
또 형사합의33부는 공소 제기 당시 적용된 반공법이 지금의 국가보안법으로 개정됐기 때문에, 개정되면서 신설된 '이 법을 해석 적용할 때는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라는 조항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최초 기소 당시 적용된 법령이 변경됐다면, 재심에선 변경된 법령을 적용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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