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은 性이 없다③] 행복 한 다발 안겨주는 '꽃을 든 남자'
입력: 2019.08.27 05:00 / 수정: 2019.08.27 09:17
플로리스트 장웅조 비아보스코 대표가 23일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자신의 매장에서 <더팩트>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새롬 기자
플로리스트 장웅조 비아보스코 대표가 23일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자신의 매장에서 <더팩트>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새롬 기자

고용노동부 한국직업사전에 따르면 국내 존재하는 직업은 총 1만2145개에 이른다. 직업은 많지만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성역할 고정관념'은 여전하다. 2018년 기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52.9%를 기록했지만 전문·관리직 종사자는 23%에 그쳤다. 대부분 사무·서비스·판매 분야에 치우쳤다. 과학기술연구개발인력에서 여성 비율은 20% 수준이고, 여성노동자의 40%가 비정규직으로 남성의 2배에 가깝다. '성역할 고정관념'은 남성도 불행하게 한다. 성별에 관계없이 발달한 잠재력을 억누르고 '남성에게 걸맞는 직업'에서 약육강식 경쟁을 벌여야 한다. <더팩트>는 뿌리깊은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세 사람을 만났다. 발레리노 임선우 씨, 서울교통공사 기관사 김미영 씨에 이어 플로리스트 장웅조 씨가 마지막 인터뷰이다.

18년차 남성 플로리스트 장웅조 대표 인터뷰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플라워디자인 교육 전문 업체 '비아보스코'의 장웅조(37) 대표가 꽃과 사랑에 빠진 것은 18년 전 일이다. 꽃꽂이를 배웠던 어머니를 데리러 갔다가 어머니가 만든 꽃을 몇 번 본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장 대표는 평생 회사원으로 살아온 아버지를 따라 경영학과에 입학한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다른 청년들이 그렇듯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회사에 취업하는게 미래의 전부라 여겼던 장 대표의 가슴에 꽃씨가 뿌려졌다. 어려서부터 미술과 만들기를 좋아했던 장 대표의 재능과 꽃에 대한 사랑이 합쳐지자 자연스럽게 플로리스트의 길에 빠지게 됐다. 자신을 데리러 올 때마다 엄마보다 꽃에 더 눈길을 주던 아들을 보고 일찌감치 눈치챈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에게 플로리스트가 되겠다고 말하기 쉽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플로리스트란 그저 '꽃집 사장님'으로 통했다. 아르바이트로 번 푼돈과 어머니의 지원으로 다닌 학원에도 플로리스트가 되겠다는 남자는 그밖에 없었다. 결국 한국보다 플라워디자인이 발달하고, 장 대표가 선호하는 디자인과 잘 맞았던 영국 유학을 결심했다. 꽃에 대한 의지야 뜨거웠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결국 그제서야 아버지께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플로리스트가 되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장 대표는 플로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직후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플라워 디자인이란 일과, 허우대 멀쩡한 20대 청년이 꽃 만지는 일을 하겠다는 것에 대한 낯선 시선을 동시에 느꼈다. 그의 결심을 들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남자가 꽃집 차리게?"라고 되물었다. 꽃향기가 가득한 가게에 주인으로 앉아 있는 친구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듯 "아, 농장에서 꽃 재배하려는 거구나"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장 대표도 처음에는 열심히 설명했지만 곧 "응, 꽃집 하려고"라며 웃어 넘겼다. 이외에도 플로리스트가 되고 싶은 남자라고 소개했을 때 대뜸 성소수자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다. 장 대표는 영국 유학을 마치고 2010년 G20 정상회의 당시 플라워데코 디자인 팀장을 지낼 정도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의 매장에 꽃꽂이를 배우러 온 고객은 발렛 기사인줄 알고 차를 맡겼다.

남성 플로리스트로서 산 세월이 녹록치 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장 대표는 언제 보람을 느끼냐는 질문에 "항상 있다"고 확신한다. 플로리스트 특성상 기쁠 때든 슬플 때든 누군가를 위해 꽃을 선물하고 싶은 이들의 방문이 대부분이다. 새벽부터 무거운 재료를 사와 뒷목이 뻐근할 정도로 일해도 "장 대표님 꽃이 제일 예뻐요"라는 말 한마디면 그동안의 고생이 눈 녹듯 녹는다. 그가 처음 이 분야로 진출했을 때에 비해 플로리스트는 훨씬 대중적인 직업이 됐다. 웨딩홀부터 장례식 화환, 꽃 특유의 아름다움과 향기로 숍인숍(Shop in shop, 매장 안 또 다른 매장) 형태로 창업하는 등 진출 분야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남성 플로리스트 비율은 그의 체감으로 15% 정도에 불과하다. 플로리스트를 꿈꾸지만 사회가 정한 성 고정관념의 벽을 넘지 못한 이들에게 장 대표는 자기 실력과 성실함만 갖추면 성공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며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언제부터 플로리스트를 꿈꾸셨나요.

어릴 때부터 미술과 만들기를 좋아했어요. 꽃을 막 시작할 때만 해도 몰랐는데, 플라워디자인 역시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미술의 일부분이더라구요. 원래 건축이나 디자인 쪽으로 나가려 했지만 안정적인 회사에 들어가서 잘 먹고 잘 사는게 최고인 시대였기 때문에 경영학과를 택했죠.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어머니께서 꽃꽂이를 배우셨어요.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가 자연스럽게 꽃을 접하게 된 거에요.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는데 점차 꽃 쪽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본능'처럼 밀려오더라구요. 그래서 이쪽으로 아예 진로를 정하게 됐습니다. 진로를 정할 때만 해도 아예 '플라워디자인만 하고 살아야지'라는 마음은 아니었어요. 회사원이라든가 다른 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하는 정도로 생각했거든요.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이렇게까지 올인할 줄 몰랐어요. (웃음)

-부모님으로서는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이 생소하고, 아들이 꽃 관련 일을 한다는 건 더 생소했을텐데.

어머니의 꽃꽂이 학원 때문에 숨겨왔던 본능이 나온 터라 어머니는 알고 계셨죠. 그런데 아버지께는 입이 안 떨어지는 거에요. 평생 회사에 몸담은 아버지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경영학과를 선택한 이유도 컸거든요. 그 때문에 군대를 다녀와서 20대 중반이나 된 복학생 아들이 이제 와서 꽃꽂이하겠다는 말을 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특별히 아버지와 불편한 사이였거나 그러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입이 안 떨어지더라구요. 그런데도 결국 알릴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돈 때문이었습니다. (웃음) 처음에는 아까 말씀드렸듯 취미로, 기껏 일해봤자 부업 정도로 생각하고 배운건데 정신차리고 나니 너무 깊이 들어와있었어요. 더 공부하기 위해 영국 유학을 결심했는데 워낙 돈이 비싸니 아버지께 말할 수밖에 없었죠.

-나름 '폭탄선언'이었을텐데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아버지께서 반대보다는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말씀드렸듯 평생 회사에 몸담은 분이라 당신의 아들도 회사에 들어가 남이 주는 돈 받고 안정적으로 살길 원하셨으니까요. 그래도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지원해주셨는데 지금은 아주 좋아하십니다. 플라워디자인도 하나의 기술이라면서. (웃음) 당시 친구들은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에 대해 잘 몰랐던지라 "나 플로리스트 할게"라고 말하면 백이면 백 "남자가 꽃집 사장하게?"라는 말이 돌아왔거든요. 신체건강한 남자가 꽃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말하니 시골가서 꽃 키우는 농사 지으려는 줄 아는 친구도 있었어요. 한 번은 꽃 일을 배우고 있다하니 조심스럽게 "혹시 성소수자냐"라고 물어보는 이도 있었죠. 지금은 그래도 인식이 많이 좋아져서 무례한 질문은 전혀 받지 않습니다.

-영국 유학길을 떠났는데, 남성 플로리스트를 바라보는 외국과 한국의 시선에 차이가 있나요.

일단 '꽃'의 의미 해석부터 다릅니다. 한국에서 꽃이란 프로포즈, 기념일 등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식물인데 반해 외국에서 꽃이란 생필품이죠. 늘 집에 꽃병이 구비돼 있고 출퇴근길에 마음에 드는 꽃을 사가는 문화가 자리잡혔습니다. 유럽에 가면 우리나라 마트에 정육점이나 생선가게가 있는 것처럼 늘 꽃을 무더기로 파는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어요. 이렇다보니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에도 상당히 열려 있어서, 종사자 성비가 5:5는 됩니다. 오히려 새벽마다 도매시장에 가서 무거운 재료를 구입하는게 일상이다보니 남성 플로리스트를 선호하는 분위기에요. 그리고 한국은 "여성=꽃"이라는 성 차별적 인식이 만연해요. 그러다보니 덩달아 남성 플로리스트에 대해서도 굉장히 이질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플라워디자인이 유명한 나라는 여럿이었을텐데 굳이 영국을 택한 이유는.

건축양식처럼 플라워디자인 역시 각 나라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름답고 화려한 꽃과는 결이 달라요. 흔히 '풀때기'라고 말하는 소재(꽃꽂이에 사용되는 재료)를 많이 채워넣어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은 연출하는게 영국식 꽃꽂이에요. 꽃과 풀의 비율을 4:6으로 채우면 영국식 꽃다발이 됩니다. 제가 막 플로리스트가 되려고 했을 때 플로리스트 사이에도 형형색색의 화려한 디자인이 유행이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푸르른 녹음이 가득한 스타일에 충격받았지만 신선함에 이끌려 영국식 꽃꽂이를 배우게 됐어요. 최근에는 꽃이 만발한 디자인보다 풀 소재를 많이 써서 자연스럽게 연출하는게 인기인데, 나름 틈새시장을 공략한 셈이죠. (웃음)

플로리스트 장웅조 비아보스코 대표가 23일 서울 청담동 자신의 매장에서 영국식 꽃꽂이를 선보이고 있다. /이새롬 기자
플로리스트 장웅조 비아보스코 대표가 23일 서울 청담동 자신의 매장에서 영국식 꽃꽂이를 선보이고 있다. /이새롬 기자

-현재 운영 중인 비아보스코 탄생에 우여곡절이 많았다죠.

현재는 비아보스코와 다른 브랜드를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사실 영국에서 돌아온지 3년째 되던 2011년에 처음으로 차린게 비아보스코라 더 '아픈 손가락'이긴 하죠. 꽃꽂이 수업과 브랜드 행사 때 쓰일 꽃을 디자인하는게 주 업무인데 무엇보다 이름을 지을 때 고민이 많았어요. 꽃집은 대부분 꽃 이름을 따와서 이름을 짓는데 제가 꽃집을 내려니 예쁜 꽃 이름은 다 쓰이고 없더라구요. 그러다 이탈리아에서 살던 분과 대화 중 '비아'(Via, 이탈리아어로 골목)라는 단어를 듣고 "아, 이거다!" 싶었어요. 마침 제가 고수하는 스타일이 영국식이다보니 '보스코'(Bosco, 이탈리아어로 숲)라는 단어와 합쳐 '숲속의 골목'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죠. 언제 우리 꽃집 찾으려고 검색했는데 지방에 어느 커피숍에서 이름을 쓰고 있더라구요. 나름 고심 끝에 지은건데, 뭐 없는 단어를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해서 그냥 살고 있습니다. (웃음)

-한국 시장에서 남성 플로리스트로 산지 10년이 가까워오네요.

어렵게 떠났던 영국 유학도 이제 가물가물해요. 한국에서 남성 플로리스트로 사는 건 참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했어요. 좋은 일부터 말하자면 2010년 G20 정상회의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당시 각국 정상이 회담하는 장소를 꾸미는데 남성 플로리스트를, 정상 부인이 모이는 장소를 꾸미는데 여성을 썼는데 꽃 만드는 일에 남자가 잘 없다보니 운좋게 큰 기회를 잡을 수 있었죠. 일을 성공리에 끝내고 앞으로 '높은 분'들이 더 불러주지 않을까 기대에 부풀었는데, 알고보니 청와대처럼 국가기관은 같은 사람을 쓰는 건 문제가 된다고 기피한다더라구요. (웃음) 어쨌든 이 일로 자신감을 얻고 창업했는데, 꽃꽂이 수업을 하던 날 가게 앞에서 청소하던 저에게 수강생이 발렛 기사인 줄 알고 차를 맡기고 가셨어요. 이외에도 남성 플로리스트에 대한 편견은 워낙 많이 들어서 이제는 무덤덤해요. 그냥 앞으로 꽃 만드는 일에 많이 불러만 주신다면 불만은 없습니다.

-그래도 일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많았겠죠.

거짓말 안 하고 꽃을 만들 때마다 항상 보람을 느껴요. 꽃은 주로 누군가를 위해 쓰이는 선물이잖아요. 소소하게는 제가 제가 막 꽃을 배우는 단계일 때 연습용으로 완성한 작품을 지금의 아내에게 자주 선물했었어요. 업계에 뛰어든 후에도 청혼하는 남자의 꽃다발, 결혼을 앞둔 신부의 부케 등 뜻깊은 선물을 만드는 일이라 완성하고 나면 늘 행복합니다. 손님들이 "장 대표 꽃이 제일 예뻐요"라고 말해주면 기쁨은 배가 되구요. 이 일을 시작하고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도매시장에 재료를 사러 가는데, 아침마다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장 대표처럼 플로리스트를 꿈꾸는 남성에게 할 말이 있다면.

틀에 박힌 말일 수 있지만 성실할 자신만 있다면 아무 생각말고 무조건 도전하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수강생을 만날 때마다 하는 이야기인데 타고나는 능력이 1~20%라면 나머지는 성실함으로 채워지는게 플로리스트의 일입니다. 성실하게 꾸준히 일할 수 있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게 플로리스트죠. 웨딩홀 화환부터 장례식 근조화, 각종 케이터링업체 지원까지 진출 분야도 무궁무진해요. 최근에는 꽃 특유의 아름다움과 매력으로 의류매장에서 숍인숍 형태로 창업하자는 제의도 많이 옵니다. 종사자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발전할 직종이라고 확신합니다. 생각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세요.

제19회 나이팅게일 선서식이 열린 2017년 11월 경기 수원 아주대학교 종합관에서 학생들이 나이팅게일의 생명존중과 숭고한 간호 정신을 이어받을 것을 다짐하며 ‘나이팅게일 등불에 불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제19회 나이팅게일 선서식이 열린 2017년 11월 경기 수원 아주대학교 종합관에서 학생들이 나이팅게일의 생명존중과 숭고한 간호 정신을 이어받을 것을 다짐하며 ‘나이팅게일 등불'에 불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남자가 왜?", "꽃밭에서 일하네"…상처주는 성역할 고정관념

통계에 따르면 성별에 따른 직업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여학생이 드물어 공과대학에 다니는 여성을 두고 '공대 아름이'라고 대상화하던 시대였지만, 종로학원하늘교육이 1985~2018년 여자 공대생 수 및 비율을 조사한 결과 1985년 5487명에서 2018년 10만 9190명으로 20배 가량 증가했다. 1996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공대를 최초 신설한데 이어 숙명여자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등 주요 여대가 공대를 신설한 것도 큰 몫을 했다. 남성의 전유물이던 엔지니어에 도전하는 여성들이 많아졌다는 변화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반대로 간호학과와 가정대학(현 생활과학대학)에 관심을 보이는 남학생 역시 증가 추세다. 같은 기관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남자 간호대생은 2000년까지 전국에서 100명 미만이었다. 그러나 지난 해에는 만 명에 육박하는 9536명으로 집계됐다. 남자 가정대생 역시 1983년 연세대학교에서 가정대 남학생 지원을 허용한 후 점점 많아져 지난 해 약 5만 명을 기록했다. 1990년을 전후한 시기에 가부장제 사회 속 여성을 연상시키는 '가정'이라는 단과대 이름을 생활과학대학으로 바꾼 후 해마다 만 명씩 늘어나는 추이를 보인다.

이처럼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쉽지 않은 도전을 하는 이는 많아졌지만, 특정 성별로 규정되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이성(異性)은 여전히 "나도 여기에 있다"고 외치는 '별종' 대우를 받는다. 평균 근무연수 5년을 겨우 넘기는 간호사 직업군에서 7년차 간호사로 일하는 가천대학교 길병원의 오영준 간호사는 간호사로 살아가는 에피소드를 담은 웹툰을 연재하고 전시회까지 열었다. 그럼에도 일선의 남성 간호사들은 환자들에게 "혹시 의사냐"는 질문을 받고 묘한 시선에 시달려야 한다.

일선에 나와있는 이들의 외침은 끊임없다. 여성 국회의원 공천 할당제 추진, 인하공업전문대학 항공운항과의 신입생 성별 기준 폐지 등 성 고정관념을 탈피하고자 하는 국가적 차원의 노력 또한 그렇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문이 넓어진다 한들 사회구성원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일까.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발행한 성평등한 진로교육 추진을 위한 실태 분석 및 정책 방안'(2019)을 보면, 남자고등학교에 간호사나 헤어디자이너 체험 수업을 하려고하자 다름 아닌 해당 학교 교사가 "학부모가 싫어한다"고 항의한 사례도 있었다.

굳이 공론화된 문제점을 찾지 않아도 여초 직업군에 종사하는 남성들은 미성숙한 인식에 시달린다. 대뜸 "성소수자냐"는 질문을 받은 장 대표를 비롯해 "여자 만나려고 그러냐", "꽃밭에서 일하네" 등 그들의 직업의식을 외면하고 다른 이의 인권까지 침해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못난 구석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노동시간이 긴 나라다. 사실상 한 사람의 일생에서 직업과 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에서 직업에 대한 성 고정관념을 벗는데 앞장서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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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raoh_@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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