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 포커스] 악몽의 28년, 화성 연쇄살인 사건
  • 황신섭 기자
  • 입력: 2014.09.15 06:11 / 수정: 2014.09.15 11:13
화성 연쇄살인 사건 2차 희생자 박모 씨 알몸 시체는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현 진안동 병점 육교 아래)의 농수로에서 발견했다. 연쇄살인 사건 현장 중 자세히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화성=황신섭기자
화성 연쇄살인 사건 2차 희생자 박모 씨 알몸 시체는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현 진안동 병점 육교 아래)의 농수로에서 발견했다. 연쇄살인 사건 현장 중 자세히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화성=황신섭기자

[더팩트|화성=황신섭기자] 살인마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는 평범한 이웃인 척 우리 곁에 있는 것일까. 아무도 몰래 죽은 것일까. 아니면 다음 희생자를 기다리며 오랜 시간 숨을 고르는 중일까.

그 사이 참혹했던 사건 현장엔 아파트와 도로, 육교가 생겼다. 살인의 흔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은 지금도 슬피 울고 있다.

대한민국을 공포와 충격에 빠트린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올해 28년이 됐다.

<더팩트>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되짚고자 지난 12일 당시 범행 현장을 직접 찾았다. 그 날을 기억하는 일부 토박이 주민도 만났다. (▶[관련기사] [TF 포커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오해와 진실)

당시 수사기록과 여러 자료, 취재 내용을 토대로 이 사건을 둘러싼 의혹과 터무니없는 헛소문의 실체를 다시 한번 파헤쳤다.

◆여성 9명 노린 희대의 살인마 출현

살인마는 1986년 9월 15일 오전 6시 20분께 첫 범행을 저질렀다.

희생자는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현 안녕동)의 딸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돌아가던 이모(71) 씨였다. 이 씨 시체는 주변 풀밭에서 발견했다. 사망 원인은 액살(사람 목을 손으로 졸라 죽이는 것)로 드러났다.

당시 이 씨 다리는 엑스자 모양으로 접혀 아랫배에 밀착한 괴이한 모습이었다. 특이한 사건이었지만 그 누구도 이를 핏빛 연쇄살인의 시작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살인은 멈추지 않았다.

1986년 10월 20일 오후 10시께 맞선을 보고 돌아가던 박모(25) 씨가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현 진안동) 주변 농수로에서 알몸 시체로 발견됐다.

그녀는 첫 희생자 이 씨처럼 목 졸려 죽었으나 흉기에 4곳이나 찔린 상태였다. 성폭행 흔적도 있었다.

3~4번째 피해자는 이틀 간격으로 발생했다.

권모(24) 씨는 1986년 12월 12일 오후 11시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자기 집 앞 50m 지점에서, 회사원 이모(21) 씨는 같은 해 12월 14일 오후 11시께 화성시 정남면 관항리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각각 살해당했다.

살인마는 이때부터 살인 방법을 교살(끈이나 스타킹 등으로 목을 졸라 죽이는 것)로 바꿔 시체에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여고생 홍모(18) 양과 주부 박모(29) 씨, 안모(54) 씨, 김모(14) 양, 권모(69) 씨가 비슷한 수법으로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희대의 살인마는 1991년 4월 3일 마지막 살인을 끝으로 종적을 감췄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범인이 액살과 교살을 살해 수법으로 선택한 이유는 특별한 도구 없이도 여성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며 “시체를 훼손하거나 기이한 행동을 보인 점을 볼 때 아마도 성 정체성에 문제가 있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희대의 살인마는 1986년부터 1991년 사이 여성 9명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8차 사건은 모방범죄로 밝혀졌기 떄문에 피해자 한명을 희생자에서 뺐다. 당시 경찰 수사기록을 보기 쉽게 사건일지로 재구성했다./일러스트 황신섭기자
희대의 살인마는 1986년부터 1991년 사이 여성 9명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8차 사건은 모방범죄로 밝혀졌기 떄문에 피해자 한명을 희생자에서 뺐다. 당시 경찰 수사기록을 보기 쉽게 사건일지로 재구성했다./일러스트 황신섭기자

◆잔혹하고 기괴한 범행 수법, 살인마는 지능범인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잔혹하고 기괴한 범행 수법 탓에 사람들을 더 큰 공포에 빠트렸다.

범인은 피해자 몸에 우산이나 복숭아 조각을 찔러 넣거나 가슴을 칼로 19번이나 긋는 엽기 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여성을 노렸지만 나이는 따지지 않았다. 또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하다가 점차 도구(스카프, 블라우스, 속옷 끈)를 이용하기도 했다.

범인은 때로는 알몸 상태로, 어떤 피해자는 윗옷만 벗겨 은닉했다. 또 다른 피해자에겐 재갈을 물리기도 했다.

수사의 혼선을 주려던 범인의 치밀한 계획으로 보인다.

이름 밝히기를 거절한 한 경찰 관계자는 “다른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연쇄살인이 있었는데 당시 상황(인터넷이 없던 시절)을 고려할 때 범인이 이런 수법을 알아 따라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범인은 어리숙한 시골 뜨내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살인을 저지른 지능범에 가깝다”고 말했다.

◆생존자·목격자·제보자 있었지만 매번 ‘허탕’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 동원된 경찰은 200여만 명, 용의자로 몰려 조사받은 사람만 2만 1000명이다. 지문 대조 4만 건에 모발 감정도 180건이나 했다. 그러나 범인은 잡지 못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경찰은 첫 사건 때부터 단추를 잘못 뀄다. 경찰은 애초 이 사건을 개별 사건으로 보고 공조 수사를 빨리 하지 못했다.

실제로 경찰은 1~3차 사건 당시 화성경찰서장이 수사본부장을 맡아 3개 수사 실무팀과 1개 관리반으로만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다 4차 사건 이후부터 경기경찰청 부국장(경무관)을 수사본부장에 앉혀 뒤늦게 수사력을 확대했다.

유일한 생존자와 목격자도 있었다.

김모(45) 씨는 1986년 11월 30일 오후 9시, 집 주변 논길에서 살인마와 마주쳤으나 범인이 한 눈을 판 사이 극적으로 도망쳤다.

그녀는 범인을 ‘키 160㎝~170㎝ 사이의 호리호리한 몸매. 25~30세 사이 남성’으로 기억했다.

경찰과 기자 사이에서 이른바 ‘갑동이’로 불린 유력한 용의자를 목격한 사람도 있었다.

1988년 9월 8일 오후 9시께 발안~수원간 시외버스에 탄 7차 사건 용의자의 모습을 운전기사와 안내원이 또렷하게 기억했다. 이미지 원본은 하승균의 책 화성은 끝나지 않았다에서 따왔다./일러스트 황신섭기자
1988년 9월 8일 오후 9시께 발안~수원간 시외버스에 탄 7차 사건 용의자의 모습을 운전기사와 안내원이 또렷하게 기억했다. 이미지 원본은 하승균의 책 '화성은 끝나지 않았다'에서 따왔다./일러스트 황신섭기자

당시 화성 발안과 수원간 시외버스를 몰던 운전기사(43)와 버스 안내원(22)은 7차 살인사건이 일어난 1988년 9월 8일 오후 한 남성을 버스를 태웠다고 진술했다.

이 남성이 버스를 세운 곳은 피해자 시체를 발견한 지점에서 불과 400m 떨어진 곳이었다.

운전기사는 “남성은 무릎까지 젖었고 버스에서 담배를 피웠다”고 말했다. 스포츠형 머리에 165㎝~170cm 가량의 키. 25~27세 사이의 남성. 이들의 기억도 생존자 김 씨와 매우 흡사했다.

경찰은 현상금 500만 원을 내걸고 이 남성을 추적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피해자 가족에게 범인의 정체를 안다는 편지가 온 적도 있었다.

1990년 12월 4일 9차 피해자 김양의 삼촌(33)에게 범행 개요가 적힌 편지 3장이 배달됐다.

편지에는 ‘범인은 김양 동네와 가까운 공장 사람’, ‘나이는 10대 아니면 30대’, ‘사정상 이름을 밝히지 못함. 수사에 참고하기 바람’이라고 써있었다.

경찰은 편지를 보낸 사람이 범인 또는 범인을 잘 아는 주변 인물이라고 보고 수사 했으나 정체를 밝히는 데 실패했다. 결국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여러 의혹만 남긴 채 미궁에 빠졌고, 2006년 10차 사건을 끝으로 공소시효도 만료됐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경찰 수사의 허점을 가장 잘 드러낸 사건”이라며 “유전자 확보와 범행 패턴의 유사성, 목격자 진술 등이 있었는데도 당시 경찰이 예방이나 후속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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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팀 tf.caseby@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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