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에 '환차익'까지 노렸지만…'슈퍼 엔저'에 울상
이달 29일 오전 한때 엔‧달러 환율은 160.03엔까지 치솟았다. /뉴시스 |
[더팩트|윤정원 기자] '슈퍼 엔저'가 지속하는 가운데 일학개미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특히 엔화로 미국 국채 투자에 나섰던 투자자들의 고충이 크다. 채권 가격 상승과 환차익 모두 챙기겠단 심산으로 나선 투자였으나, 안갯속에 빠진 미국의 금리 인하 시점과 엔저로 인한 환손실까지 더해지며 일학개미들의 피해가 막심한 상황이다.
◆ 엔‧달러 환율, 34년 만에 160엔 돌파
일본 공영방송 NHK 등에 따르면 전날인 29일 오전 한때 일본 환율은 달러당 160.03엔까지 치솟았다. 엔‧달러 환율이 160엔을 넘어선 것은 1990년 4월 이후 34년 만이다. 엔‧달러 환율은 올해 1월 2일만 해도 140엔대 수준이었으나 가파르게 오름세를 이어갔다. 올해 2월 150엔을 돌파한 데 이어 이날은 기어코 160엔을 넘어섰다.
특히 일본은행이 이달 25~26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한 이후 엔‧달러 환율은 급격한 상승세를 나타냈다. 26일 금융정책회의 이후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기자회견에서 "(최근의 엔저가) 기조적인 물가 상승률에 미치는 큰 영향은 없다"고 언급한 것이 엔화 약세를 부추긴 모양새다. 당시 시장에서는 '일본은행이 엔저를 이유로 추가 금리인상에 나설 일은 없다고 공언한 것'이라는 해석이 다수였다.
엔‧달러 환율이 150~160엔선에서 등락하면서 관련 종목에 투자하던 국내 투자자들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엔화 환율이 바닥을 다졌다는 인식하에 환차익을 노리며 투자에 뛰어들었으나 엔화 가치가 바닥을 넘어 땅굴을 파고 있는 탓이다. 엔화 상승과 미국 주식 상승이라는 대전제는 투자자들의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투자자들의 손해가 큰 1순위 종목으로는 '아이셰어즈 미국채 20년 만기 엔화 헤지(Shares 20+ Year US Treasury Bond JPY Hedged) 상장지수펀드(ETF)'를 들 수 있다. 해당 ETF는 엔화로 만기 20년 이상의 미국 초장기채에 투자할 수 있는 상품이다.
한국예탁결제원 증권정보포털 세이브로(SEIBro)에 따르면 최근 한 주(4월 22일~26일)동안에도 일학개미들 해당 ETF를 가장 많이 사들였다. 일주일 새 총 1220만 8470달러(약 170억 원)의 투자자금이 몰렸다. 그러나 이 ETF는 올해 들어 이달 26일까지 14.78%의 손실을 기록했다.
일본 증시에 간접 투자한 이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환율 변동에 자산을 노출하는 환노출형 ETF에 배팅한 이들이 대표적이다. 현재 국내에 상장된 엔화 노출 미국 장기채 ETF들의 수익률도 처참한 수준이다. 지난해 12월 말 상장한 KB자산운용의 'KB STAR 미국 30년 국채 엔화노출(합성H) ETF'의 경우, 이달 26일까지 14.92%나 빠진 것으로 집계됐다.
엔화로 미국 국채 투자에 나섰던 이른바 일학개미들은 울상을 짓고 있다. /더팩트 DB |
◆ 엔화 약세 지속 전망…美 금리인하 '오매불망'
시장에서는 당분간 엔화 약세가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다수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은행이 엔화 가치 급락에도 불구하고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밝히는 동시에 일본 정부 역시 구두개입 이외에 적극적인 실개입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점이 최근 엔화 약세에 영향을 미쳤다"며 "일본은행의 정책 부재 시 엔·달러의 추가 상승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투자자들은 미국의 금리 인하만 기다리고 있는 꼴이 됐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오는 6월부터 세 차례 금리 인하에 나설 것이라던 종전 예상과 달리 현재는 9월부터 두 차례에 그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연준의 금리 인하 기대는 계속해 후퇴, 급기야 연내 인하가 없을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 상태다.
더욱이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예상치를 웃돌고 고용과 소비지표가 호조를 보이면서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기대감은 더욱 약화되는 추이다. 경제지표들이 금리를 내릴 수 없는 환경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허진욱 삼성증권 연구원은 "향후 수개월간 인플레이션의 추가적인 둔화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현 수준에서 금리를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취지의 발언이 예상된다"면서 "이 과정에서 금리 인하를 서두르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일부에서 제기하는 추가 인상에 대해서도 신중한 입장을 표명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국제금융센터는 "미국 정책금리의 고점 유지가 길어질수록 높은 장기금리가 향후 경제 활동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크지만, 지정학적 리스크와 서비스 물가, 기대인플레이션 하방경직성에 따른 디스인플레이션 지연으로 통화정책 완화는 더디게 진행될 수 있다"고 풀이했다.
한편, 엔화 약세는 국내 외환 시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원화와 엔화의 동조화 현상이 강달러로 강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원·달러 환율이 또다시 1400원을 돌파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박상현 연구원은 "현시점에서 엔·달러 환율을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엔·달러 환율 흐름이 원·달러 환율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와 미 연준의 금리 인하 지연 등으로 불확실성이 커진 금융 시장에 엔·달러 환율마저 가세한다면 불안이 더욱 증폭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