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반도체 위기 극복 앞장
7년 만에 '서든 데스' 꺼낸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오른쪽)이 지난 19일 기흥·화성 캠퍼스를 찾아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삼성전자 |
[더팩트ㅣ이성락 기자] 글로벌 경기 침체와 공급망 위기, 지정학적 리스크 심화 등으로 인해 경영 환경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위기감을 느낀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은 잇달아 '극복 메시지'를 내놓으며 비상 모드에 돌입한 모습이다. 환경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연말 인사를 앞당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3일 재계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19일 삼성전자 기흥·화성 캠퍼스를 방문해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 건설 현장을 둘러봤다. 또 경계현 DS부문장, 이정배 메모리사업부장, 최시영 파운드리사업부장, 송재혁 DS부문 CTO 등 반도체 부문 주요 경영진과 간담회를 열고 첨단 공정 개발 현황, 기술력 확보 방안, 공급망 대책 등 주요 현안에 대해 심도있게 논의했다.
이재용 회장은 지난해 복권된 이후 첫 공식 방문지로 기흥 캠퍼스를 택했다. 회장 취임 1주년(27일)을 앞둔 상황에서 재차 기흥 캠퍼스를 찾은 건 사업적 중요도가 높은 데다, 최근 반도체를 둘러싼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반도체는 삼성의 주력 사업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체 수출을 책임지는 국가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으며, 글로벌 패권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경제·안보동맹의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도 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수출 규제 등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삼성 반도체 사업이 태동한 기흥 캠퍼스를 방문, '반도체 초격차' 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다.
키워드는 '위기 극복'이다. 반도체 사업을 직접 챙기는 모습을 통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술 격차로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한국이 반도체 강대국으로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실제로 이재용 회장은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반도체 전략을 점검하며 "대내외 위기가 지속되고 있지만, 다시 한번 반도체 사업이 도약할 수 있는 혁신의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술 리더십과 선행 투자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18일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서 열린 '2023 CEO 세미나'에서 폐막 연설을 하고 있다. /SK그룹 |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위기의식과 쇄신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6년 6월 확대경영회의에서 처음 언급한 '서든 데스'(돌연사) 화두를 다시 던지며 SK 최고경영자(CEO)에게 강도 높은 혁신을 주문했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 16~18일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서 열린 '2023 CEO 세미나'에서 지정학적 위기 심화 등 대격변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 기민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급격한 대내외 환경 변화로 인해 앞으로 빠르게, 확실히 변화하지 않으면 '서든 데스'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재계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이 '서든 데스'를 재차 언급한 건 그만큼 현재 SK그룹이 맞닥뜨린 경영 환경을 엄중히 보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최태원 회장은 한국 경제와 SK그룹이 직면한 주요 환경 변화로 △미·중 간 주도권 경쟁 심화 등 지정학적 이슈 △인공지능(AI) 등 신기술 생성 가속화 △양적 완화 기조 변화에 따른 경기 불확실성 증대 △개인의 경력 관리를 중시하는 문화 확산 등을 꼽았다. 이어 SK그룹이 생존하기 위한 전략 방향으로 △글로벌 전략과 통합·연계된 사회적가치(SV) 전략 수립·실행 △미·중 등 경제블록별 글로벌 조직화 △에너지, AI, 환경 관점의 솔루션 패키지 등을 제안했다.
최태원 회장은 CEO들에게 사업 확장과 성장의 기반인 투자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투자 완결성 확보를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투자 결정 때 매크로(거시환경) 변수를 분석하지 않고, 마이크로(미시환경) 변수만 고려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최태원 회장이 강도 높은 발언을 내놓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올해 그룹 차원의 회의 때마다 강한 어조로 다양한 상황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비상 태세를 요구하고 있다.
구자은 LS그룹 회장이 지난 6일 안양 LS타워에서 열린 'LS 퓨처 데이'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LS그룹 |
최태원 회장은 지난 6월 열린 확대경영회의에서 "지금 우리는 과거 경영 방법만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글로벌 전환기에 살고 있다"며 "미·중 경쟁과 이코노믹 다운턴, 블랙스완으로 부를 수 있는 예기치 못한 위기 변수들은 물론, 기회 요인에 대응하기 위해 시나리오 플래닝 경영을 고도화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기업을 둘러싼 국내외 경영 환경은 크고 작은 사인포스트(징후)가 나타나면서 서서히 변한다"며 "이 같은 징후들이 나타날 때 즉각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훈련돼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 다른 그룹 총수들 역시 위기감을 감지, 하나둘 내부 구성원을 대상으로 당부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지난 9일 창립 71주년 기념사에서 "지속적인 사업 재편과 M&A 등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한화그룹이 지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창업 시대의 야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과감한 혁신을 이어갈 때 불확실성은 성공의 새 역사로 채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LS그룹은 이달 초 경영진과 임직원 등 200여 명이 참석한 'LS 퓨처 데이'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러·우크라 전쟁, 미·중 간 무역 갈등 등 국제 질서의 변화 속에서 그룹의 방향성을 점검하기 위해 정치, 외교, 경제 분야 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를 듣는 포럼을 열었다. 'LS 퓨처 데이'에 참석한 구자은 LS그룹 회장은 "위기일수록 위험보다 미래 기회를 포착하자"고 격려했다.
불확실한 경영 환경 속에서 선제적으로 내년도 경영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기업별 연말 인사가 다소 앞당겨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재계에서는 SK그룹과 롯데그룹이 거론되는 중이다. 재계 관계자는 "인사 결과를 바탕으로 사업 실행 계획을 세우는 만큼, 변화가 시급할 경우 인사가 예년보다 더 빠르게 단행될 수 있다"며 "다만 그 폭은 예상할 수 없다. 어지러운 상황 탓에 오히려 안정에 무게를 두는 기업들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rocky@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