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29일 '전셋값 인상 논란'이 불거진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사진)을 전격 경질했다. /더팩트 DB |
'오래된 차', '낡은 가죽 가방'보다 중요한 것은 떳떳한 말과 행동
[더팩트 | 서재근 기자]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29일 김 실장을 전격 경질했다. 현 정부의 부동산 규제 정책을 주도한 인물의 불명예스러운 경질 사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셋값 인상 논란'이다.
2021년 고위공직자재산신고 현황에 따르면 김 실장은 배우자와 공동소유한 서울 강남구 청담동 한신오페라하우스2차 전세 보증금이 8억5000만 원에서 9억7000만 원으로 14.1% 늘어났다고 신고했다.
김 실장이 지탄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가 보증금을 인상한 시기에 그 해답이 있다. 그가 세입자와 전세계약을 갱신한 시점은 지난해 7월 29일이다. 이는 전·월세 상한제 도입을 골자로 한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 등 임대차 3법이 시행되기 이틀 전이다. 임대차 3법 시행으로 정부가 설정한 보증금 상한 폭은 최대 5%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지 하루 만에 김 실장은 "부동산 투기 근절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엄중한 시점에 (국민들께) 크나큰 실망을 드려 죄송하다"며 고개 숙여 사과하고, 쓸쓸히 퇴장했다.
'대기업 저격수'라는 타이틀과 함께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 수장을 거쳤던 김 실장의 과거 행보를 돌이켜 보면, 이번 정부 고위 인사의 '내로남불'식 행태가 남긴 뒷맛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지난 2018년 공정위원장 임기 1년째를 맞았을 당시 김 실장은 '대기업집단 소속 공익법인 운영실태 분석 결과'를 발표하면서 "다수 그룹이 경영권 승계를 위한 수단으로 공익법인을 악용하고 있다"며 규제 강화를 예고한 바 있다.
당시 "장학금 지원, 장애인·노인 복지 및 의료 지원 등 공익법인의 순기능을 철저히 외면한 채 '승계 자금 창구'라는 낙인을 새기는 것과 같다"며 재계 안팎에서 나온 우려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공허한 메아리'에 그쳤다.
같은 해 6월 공정위원장 취임 1년 기자간담회 당시 "총수 일가가 소유하고 있는 비주력 계열사를 처분해야 한다"는 발언도 주식시장의 혼란을 야기했다. 시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보유한 삼성SDS를 겨냥한 것이란 해석이 나오면서 수일 만에 해당 회사 시총 수조 원이 사라졌다. 기업의 이름도, 주식을 처분해야 하는 법적 근거 제시 하나 없는 공정위원장의 경고성 외마디는 곧 시장 질서 혼란으로 이어졌다. 주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김 실장은 "비상장사 주식 매각을 의미한 것"이라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어디 그뿐인가 공정위원장 임기 동안 수차례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소집하고, 그때마다 "자발적인 개혁 의지가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며 쓴소리를 뱉었던 그다. 정부 당국과 재계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 차가 수년째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청와대 정책실장의 전세 보증금 인상 논란'이 가져다준 실망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 역시 마찬가지다. 논란이 거세지자 청와대는 "김 실장이 거주하는 아파트 전세보증금이 올라 청담동 아파트 보증금 인상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인상 폭 자체가 시세보다 현저히 낮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실장이 세입자를 통해 올려 받은 전세금과 스스로 낸 보증금 차이를 두고도 뒷말이 무성하지만, 중요한 것은 '너희는 안 되고, 우리는 괜찮다'는 식의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만일 어떤 대기업이 비상장 계열사 매각과 관련해 세율이 달라진다는 정보를 사전에 알고 세법 개정 이틀 전에 비상장 계열사를 서둘러 팔아치웠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해당 기업에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매각을 진행했고, 신규 투자 자금이 필요해서 시장 예상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비주력 사업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면, 김 실장은, 그리고 그를 두둔한 청와대에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쯤에서 역으로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과연 당신들은 진정으로 부동산 개혁을 향한 자발적인 의지가 있기는 한가."
국민도 기업도 더는 '내로남불'식의 행태가 만연한 정부의 요구에 장단을 맞춰줄 여력이 남아 있지 않다.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어난 오래된 연식의 자가용과 낡은 가죽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정부 고위 인사의 '말'보다 경제계와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눈높이를 맞추려는 '행동'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란 점을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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