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팽배한 반(反)기업 정서를 없애려면 공정한 경제 생태계 못지않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풍토가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둘째 딸 최민정 중위가 지난해 11월 30일 해군인천해역방어사령부에서 전역신고를 하는 모습/뉴시스 |
SK가(家) 최민정, 대기업 자녀들과 다른 행보 눈길...‘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해야
[더팩트ㅣ김민구 기자] ‘군대 면제자는 ’신의 아들‘, 공익근무는 ’장군의 아들‘, 현역 복무는 ’어둠의 자식들‘
지금은 자취를 감췄지만 2000년대 전후만 해도 입대를 앞둔 젊은 층 사이에서 이렇게 자조 섞인 농담이 회자됐다. 우리나라처럼 병역문제에 민감한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는 하지만 인생의 황금기인 20대 청춘을 폐쇄된 공간에서 고된 군사훈련과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보내고 싶은 이들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이러다 보니 사회 고위층 자녀나 유명 연예인의 군 면제나 병역비리 등이 가끔 수면 위로 떠오르면 이들에 대한 사회적 분노는 들불처럼 타오른다.
최근에는 2018 팔렘방-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 축구와 야구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내 병역특례 혜택이 주어지자 병역 특혜 시비와 개선 요구가 연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급기야 기찬수 병무청장이 이달 3일 병역특례 제도를 손볼 때가 됐다며 제도 개선을 검토 중이라고 밝혀 진화작업에 나섰지만 논란이 쉽게 가라앉을지는 의문이다.
세계무대에서 우리나라 위상을 만방에 떨친 공로가 있는 이들에게 병역혜택을 주는 병역특례 제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축구 대표선수 손흥민 등 세계적 명성을 갖춘 이들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국민들에게 벅찬 감동을 주고 대한민국의 이름값을 높인 점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들이 굳이 병영생활을 하기보다는 병역특례 혜택을 받아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게 국가적으로 훨씬 더 이익이다. 다만 병역특례 혜택이 특정 분야에만 쏠렸다면 이제는 형평성과 합리성을 고려해 개선작업을 해야 할 시점인 것은 분명하다.
병역 혜택이 스포츠 선수나 국민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가 된 가운데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둘째 딸 최민정 씨의 전역 후 직장 선택이 최근 관심을 끌었다. 여성, 그것도 대기업 총수 딸인 그는 남자들도 내심 피하고 싶어 하는 군대에 당당히 자원입대해 화제가 된 인물이다. 또한 전역 후에는 당연한 코스로 여겨졌던 SK 계열사 대신 중국 기업에 입사해 눈길을 끈 것이다.
중국 베이징대 경영대학을 졸업한 그는 2014년 해군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다. 그렇다고 그가 군대에 가서 편안한 보직을 맡아 근무한 것도 아니다. 그는 2015년 청해부대 19진에 속해 소말리아 아덴만에 파병된 데 이어 2016년에는 서해 최전방 북방한계선을 지키는 해군 2함대사령부에서 근무했다. 그의 도전정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11월 30일 해군 중위로 전역한 민정 씨가 세간의 관심을 끄는 것은 비단 대기업 자녀의 군복무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국내 재계순위 3위 SK 오너가(家)의 자녀라는 말이 무색하게 중국 유학시절에도 아르바이트를 해 용돈을 벌었고 학비는 장학금으로 충당했다. 대기업 총수 아버지를 둔 그는 돈 걱정없이 편하게 유학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이를 극복했다.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씨는 또 최근 중국 투자회사에 입사해 관심을 모았다. 그는 지난 7월 중국 상위 10위권 투자회사 ‘홍이투자’(Hony Capital)에 취업해 현재 글로벌 기업 인수합병(M&A) 팀에서 근무 중이다.
국내 대기업 자녀들은 대부분 학교 졸업 후 아버지가 총수로 있는 회사 계열사로 취업해 짧은 시간에 초고속 승진의 길을 걷는다. 최씨는 ‘장밋빛 탄탄대로’ 대신 험로(險路)를 택했다.
한국처럼 대기업 자녀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나라도 없다. 대기업 자녀들은 유리 진열장 마네킹처럼 일거수일투족이 일반인의 호기심과 감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잊을 만 하면 불거지는 일부 대기업의 갑질과 탈세 등 불법행위로 반(反)기업 정서가 팽배한 가운데 재벌 자녀들의 일탈이 알려지는 순간 이들은 파렴치한 집단으로 매도된다.
‘있는 집 자식’에 대한 반감은 물론 우리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돈 걱정 없이 자란 특권층 자녀들을 일컫는 ‘트러스터페어리언(Trustafarian)’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부자 히피’로 불리는 이들은 부(富)를 일궈낸 부모에 비해 명석하지 못하고 생산적 삶을 누리지도 못한다.
이 때문일까. 미국 석유왕 존 D 록펠러,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 등 세계적 거부들은 자녀를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교육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약 210조 원에 달하는 거액을 모은 록펠러는 자녀에게 용돈기입장을 쓰도록 하고 용돈 사용에 따라 상금과 벌금을 매기는 ‘짠돌이식’ 경제교육을 했다. 재산규모가 약 86조원로 세계 갑부 순위 4위인 버핏도 자녀에게 용돈을 넉넉하게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남의 도움 없이 용돈을 벌었기 때문에 현재 재산을 일궈냈다고 믿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땀 흘려 번 돈으로 부를 축적한 것은 박수 받을 만한 일이다. 또한 국내 부자들은 많은 돈을 내고 있다. 근로소득세의 경우 상위 10%가 내는 세금이 전체 세수의 80%를 차지한다. 또한 법인세는 상위 1%가 전체의 86%를 낸다. 이 정도면 가진 자들이 제 몫을 하고 있다고 큰소리칠 만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국민적 시각은 싸늘하다. 이런 정서에서는 이른바 ‘부자증세’를 통해 상위 1%가 국내 전체 세금의 99%를 내더라도 있는 자에 대한 반감이 사라질지 의문이다.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회사 직원들과 운전사에게 온갖 갑질과 욕설을 퍼붓는 것은 치졸하기 짝이 없다. 대기업 자녀들의 경쟁상대는 회사 식구가 아닌 글로벌 무대이다. 회사 구성원에 대한 갑질과 언어 폭력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대기업 3,4세들은 갑질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설파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을 보여야 한다.
케인스가 1936년 출간한 그의 저서 ‘고용, 이자 및 화폐 일반이론’에 등장한 야성적 충동은 동물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사냥을 본능적으로 하듯이 기업도 경영할 때 자신의 판단과 본능에 따라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기업가정신을 뜻한다.
국내 대기업 1~2세대들은 한국경제 초석을 닦은 주인공이다. 1세대가 불굴의 의지로 기업을 일으켜 2세대가 사업 영토를 넓혔다. 1~2세대가 피땀으로 일궈낸 기업은 해외 유학을 통해 얻은 국제적 감각과 선진 경영기업으로 무장한 3~4세대가 발전시켜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다. 이들 3~4세대들은 기업가정신과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을 통해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무를 실천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반(反)기업정서에 대한 1차 책임이 일부 대기업에 있는 만큼 ‘신세대’ 대기업 자녀들은 이에 대한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13~17세기 피렌체공화국에서 340여 년 동안 부와 명예를 누리며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명문 메디치(Medici)가문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된 원인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못한 오만한 후손 탓이라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최민정 중위'가 일궈낸 잔잔한 감동이 일회성으로 끝나면 곤란하다. 대기업이 사회적 질타의 대상이 아닌 한국경제호(號)를 이끄는 핵심축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제2, 제3의 최민정 중위가 등장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