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황금연휴가 시작된 지난달 30일 울산광역시 동구에 선물상품 모음전이 열리고 있으나 소비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울산=황원영 기자 |
[더팩트│울산=황원영 기자] "추석연휴가 열흘이나 되는 게 오히려 싫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우니 쉬는 게 더 고달프고 눈치 보이네요."
울산광역시 동구에 거주하는 장모(30)씨는 최장 10일의 추석 황금연휴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최근 계약직으로 일하던 현대중공업에서 퇴직했기 때문이다. ‘일감절벽’에 직면한 조선업계가 구조조정 강도를 높이면서 함께 일하던 계약직 직원들이 대부분 사표를 냈다. 이들은 역대 최장이라는 황금연휴에 도서관에 모여 공무원 준비를 한다는 계획이다.
장 씨는 “일감이 없어 출근 후 퇴근시간까지 가만히 앉아 있는 날도 있었다”며 “계약 기간이 1년이나 남았는데 결국 나오게 됐다. 나이도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다”고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부자도시 1위 맞나? 동맥경화 걸린 지역 경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자도시로 불리는 울산의 소비심리가 고꾸라졌다. 통계청이 지난해 12월말, 울산이 2015년까지 9년 연속 개인소득 1위 지역에 올랐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주소는 '아니올시다'가 정답이라고 지역 주민들 대부분이 말했다. 부자도시는 옛말이라고 단언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울산의 자랑이자 버팀목인 현대중공업과 현대차가 흔들리면서 지역 경기는 동맥경화에 걸린 모양새다.
울산에 있는 한 현대자동차 협력업체 임원 역시 이번 황금연휴가 반갑지 않다. 연휴 하루 전인 지난달 29일 현대자동차 노조가 결선투표를 통해 강경파 인사를 차기 지부장으로 선출하면서 앞날이 캄캄해졌다. 그는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여파로 판매부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노사협상마저 진통을 이어갈 경우 경영위기가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놨다.
그는 “노사간 파행이 지속될 경우 협력사 손실도 무시할 수 없지 않느냐”며 “앞서 노조가 수차례 파업하고 특근을 거부하면서 손실액이 커졌고 그야말로 하루하루 시름하며 지냈다”고 하소연했다. 현대차 노사는 추석 연휴가 끝난 후부터 임단협을 재개한다는 계획이지만 업계는 강경 노조가 들어선 만큼 치열한 기싸움을 벌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울산 경기가 그야말로 ‘침체기’를 겪고 있다. 조선업 위기로 한때 세계 1위 선박 건조량을 자랑했던 현대중공업이 개점휴업 상태인 데다 현대자동차 역시 올해 판매부진과 노사갈등으로 내우외환인 상황이다.
추석 연휴가 시작된 지난달 30일 울산은 예년과 같이 ‘풍요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추석선물과 제수음식 마련으로 북적일법한 백화점은 지역 경기를 대표하듯 한산한 모습이었다.
현대중공업 맞은편에 자리한 백화점에는 추석 명절을 맞아 ‘한가위 선물 대표상품 모음전’을 벌이고 있었다. 백화점 내부는 물론 백화점 앞에 펼쳐진 광장에도 전통시장과 같이 판매대를 벌여놨으나 소비자는 많지 않았다.
울산 시내 한 백화점에서 추석 선물 용품을 판매하고 있다. 최근 몇년간 지역 경기가 침체되면서 선물 세트도 저가형이 주를 이룬다. |
한 판매 직원은 “추석 직전인 토요일임에도 고객이 많지 않아 걱정”이라며 “양말·생활용품 세트 등 저렴한 제품 중심으로 판매가 많이 이뤄지고 예전과 같이 고가 선물 비중이 높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판매대에 올라있는 제품들 역시 ‘1000원 수입과자’, ‘미역·멸치’, 중저가 의류, 식용유·참치·햄 등 가공식품으로 저렴한 품목이 주를 이뤘다.
백화점에 있는 커피숍에는 주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근심어린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부들은 “백화점 매출이 전국 지점 중 최하위권으로 떨어졌다”, “최근 점장이 바뀌었는데 매출이 줄어 고민이 많다더라” 등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비자 이모(52)씨는 “과거 경기가 좋을 때는 집으로 굴비, 한우세트 등 고가 선물도 많이 들어왔고 우리도 많이 사서 보냈다”며 “지금은 대부분 휴직하고 있거나 퇴직했고 분위기 자체도 좋지 않아 추석 선물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지난 30여 년간 현대중공업에 몸담았다던 이 씨 역시 최근 현대중공업에 퇴직서를 냈다.
지난 2015년부터 현대중공업 구조조정으로 대량 해직 사태가 벌어진 가운데 주변 공원 등 곳곳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장기나 바둑을 두는 퇴직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창 현장에 있을 40대가 대부분이었다. 여기에 불황으로 줄도산한 하도급 업체 직원들까지 더해져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현대重 정문 앞 '퇴직자 지원센터'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북새통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는 ‘퇴직자 지원센터가’ 올해 새롭게 생겼다. 1층에는 퇴직자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는데 사람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지원센터에서 만난 40대 후반 박모 씨는 “정년퇴직 때까지 다니고 싶었는데 결국 사직서를 냈다”며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박 씨는 “퇴직 후 협력사에 입사하려고 시도했으나 퇴직자가 많고 협력사 상황도 어려워 결국 실패했다. 아직 대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어 돈을 벌긴 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은 2012년 기준 직원들 평균 근속 연수 18.2년을 자랑했다. 하지만 최근 중공업 불황으로 퇴직자가 늘은 데다 주니어 사원 퇴직률이 급속도로 높아지며 근속 연수 최장 기업의 영광도 끝이 났다. 현대중공업 직원 박모(36)씨는 “신입사원들이 최근 몇 년간 다수 이직했다”며 “울산에 본사가 있는 만큼 자신이 공부하던 서울로 되돌아가고 싶어 퇴사한 직원도 있지만 대부분은 회사 경기가 악화되는 걸 보면서 불안한 마음을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직원 강모(32)씨 역시 “동기들이 많이 퇴사해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며 “회사에 다니면서 이직을 알아보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울산 시내 한 부동산에 급매물이 나와있다. 중공업 등 울산 주요 산업 경기가 타격을 받으면서 울산을 떠나는 인구가 많아 졌다. |
현대기아차도 국내외 판매량이 급감하면서 전 직원이 열흘간 장기휴무에 돌입했다. 과거에는 설·추석에도 교대로 주말 특근을 강도 높게 해 생산 물량을 맞췄다. 한 현대차 직원은 “이번 연휴에는 일부 인력만 제외하고 쉰다”며 “경기가 좋지 않다는 게 실감난다”고 말했다.
회사 근처에 있는 음식점 주인들 역시 몇 년 전부터 지역 경제가 침체되면서 동구 주민들의 소비심리도 잔뜩 위축됐다고 입을 모았다. 몇몇 상점은 ‘임대’ 팻말을 걸어놓은 채 셔터를 내려놓고 있었다. 한 음식점 사장은 “이미 2년 전부터 문 닫은 상점이 많고 몇몇 매장은 수시로 업종이 바뀐다”며 “그나마 단골손님으로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매출이 많이 줄어서 고민이다”고 하소연했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 최장 연휴가 시작됐음에도 손님이 없어 텅텅 빈 음식점들이 많았다.
◆ 2015년 12월부터 올 5월까지 1만5176명 울산 떠났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공장이 있는 동구 지역 집값 역시 타격을 받았다. 이 지역 일대 부동산을 돌아다녀본 결과 급매물이 쌓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부동산 외부에는 ‘급매’, ‘급전세’는 물론 ‘급급매’ 매물도 붙어 있었다. 조선업 등 일자리가 줄면서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 근처에 있는 모 아파트 값도 최근 1년 사이 4000~5000만 원 떨어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울산에서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2015년 12월부터 지난 5월까지 1만5176명이 울산을 떠난 것으로 집계됐다.
현대중공업은 조선사업부문 인력 600여명이 순환 휴직·휴업에 들어갔다. 현대중공업은 올해 하반기 유휴 인력이 5000여명 이상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해 내년 상반기까지 순환휴직과 휴업을 시행할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임단협 통합교섭에서도 아직까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울산 지역 경기가 위기에 처한 가운데 업계는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노사 관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업계가 위기에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노사가 한 발짝 물러나 힘을 모아야 할 때”라며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