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살충제 달걀'과 '생리대 부작용' 등 소비자 문제가 잇따라 발생하며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소비자가 피해를 입증하고 손해액만 청구하는 법제에서 소비자권익은 ‘구두선’에 불과
온 나라가 ‘소비자 피해 문제’로 시끄럽다. 달걀에서 살충제가 나와 식품안전 문제로 떠들썩하더니, 여성 생리대에서 유해물질이 검출돼 부작용을 호소하고, 환불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요가매트에서도 생식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물질이 나왔다.
닭에 직접 살충제를 뿌리면서 달걀에서 위험 발암물질인 피프로닐이 검출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피프로닐은 벼룩이나 진드기 같은 해충을 죽일 때 쓰는 살충제로 돼지·소·닭 등 사람이 식용으로 먹는 가축에는 사용할 수 없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피프로닐이 인체에 많이 흡수되면 간·콩팥·갑상샘 등을 손상시킨다고 하고, 미국 환경청(EPA)은 피프로닐을 위험 발암 물질로 지정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유기농으로 생산했다며 비싸게 파는 달걀에서 해당 물질이 발견됐다.
연이어 터진 유해물질은 여성 생리대 접착 부위에서 나온 휘발성유기화합물(VOCs·Volatile Organic Compounds)이다. 문제가 되는 생리대 사용 이후 생리량 감소·생리통 심화 등 부작용을 호소하는 소비자의 신고가 잇따르고 있고, 환불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왜 이렇게 툭하면 소비자 문제가 터져 나오는 것일까? 예컨대 살충제 달걀로 피해를 본 소비자들이 피해보상을 받으려면 달걀을 섭취한 뒤 신체에 이상이 나타나야 하고, 그 손해를 소비자가 입증해야 한다. 아니면 실제 손해금액은 살충제가 묻은 달걀값 정도만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어느 소비자가 살충제 달걀을 섭취함에 따라 신체에 얼마나 손해가 발생했는지 입증할 수 있을까? 그러니 잘해야 달걀값만 받으면 그만이다.
유해물질 생리대 역시 해당 생리대를 사용함으로써 발생한 '생리량 감소', '생리통 심화' 등 부작용과 암 발생확률이 높아져 손해를 본 것에 대해 소비자가 입증해야 하고, 손해액을 금전적으로 환산해 청구해야 한다. 어느 소비자가 얼마를 보상받겠다고 생리량 감소를 입증하고, 생리통이 심해졌는지를 증명해 보이려고 하겠는가? 공급자가 하는 일은 생리대 구입비용 환불이며, 그것으로 보상은 끝난다.
우리나라 법제는 손해를 청구하는 자가 손해를 입증하고 실제로 손해난 금액을 산정해 소송을 제기해야 겨우 손해난 금액을 보상받을 수 있다. 달걀 한 판에 3000원, 생리대 한 박스에 몇천 원밖에 안 되는데, 그 금액을 배상받기 위해 수백만 원씩 변호사 비용을 들여가며 소송을 할 소비자는 없다. 변호사 비용을 아끼기 위해 몇 명이 모여서 공동소송을 한다 해도 배상금액이 뻔하기 때문에 ‘소송실익’이 없다. 그래서 소비자권익 찾기는 포기하게 된다. 대부분 ‘중국집에 불이 난 것’처럼 여론만 호들갑 떨다가 다시 잠잠해지고, 또다시 이런 일들이 주기적으로 발생하기를 반복한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실손의료보험의 보험료 산출과정 및 방식의 적정성 여부 등을 검사한 결과, 약 40만 명의 보험 가입자가 보험료 100억 원을 더 내왔던 것으로 나타났다. /더팩트 DB |
금융권에서도 이 같은 사례는 찾아볼 수 있다. 최근 보험사들이 소비자들에게 실손보험의 보험료를 덤터기 씌워 100억 원 이상을 더 거둬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21개 보험회사가 보험료 산출원칙을 지키지 않아 가입자 40여만 명이 원래 내야 할 보험료보다 더 비싼 보험료를 낸 것으로 조사됐다.
2009년 10월부터는 보장을 10% 더 해주는 표준화가 이뤄졌지만, 이전 가입자는 이후 가입자보다 보험료를 만 원씩 더 냈다. 이전 가입자는 보장을 덜 받는 만큼 보험료가 내려가야 하지만 보험료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2009년 9월 가입자는 8년간 보험료 100만 원씩을 더 내왔다.
실손보험 가입자 3400만여 명 중 40만 명이 넘는 보험소비자가 피해를 봤음에도 이들은 무덤덤하고 잠잠하다. 보험사들이 소비자를 상대로 보험료 바가지를 씌워도 손해배상이나 보험료반환을 요구하지 않는다. 정말로 착한 소비자다. 금융소비자들의 소비자권익 요구는 일반 소비자 문제 대응보다 훨씬 더 무덤덤하다. 자신이 금융피해의 당사자인지 잘 모를뿐더러 금전적으로도 인당 피해는 비교적 적은 금액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나라 공급자들은 소비자들을 ‘호갱’으로 보는 것이다. 살충제 달걀을 팔아도, 발암물질 생리대를 팔아도, 보험료를 덤터기 씌워도 기껏해야 환불해주면 그만이기 때문에 우선 팔고 보자는 식이다.
그래서 징벌적 손해배상, 입증책임의 공급자 전환, 집단(단체)소송제도의 도입 등 ‘소비자권익 3법’이 없는 한 우리나라에서 소비자권리 찾기는 요원한 구두선에 불과하다.
소비자 피해를 소비자가 입증해야 하고, 손해난 금액만을 당사자만 청구할 수 있는 구시대적 법제하에서는 소비자 권리는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나 소비자단체가 권리를 찾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호들갑스럽게 여론전으로 떠들어 댈 뿐이다.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면 공급자가 '망할 수도 있다'는 인식이 생겨야 상품을 공급하기 전에 공급자가 상품의 품질과 소비자 문제 발생여부를 미리 철저히 따져보게 된다. 그렇지 않고 일단 팔고 나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된다'는 공급자의 인식하에서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또다시 소비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 도입을 약속한 ‘소비자 3법’을 하루빨리 제정해 소비자 문제의 재발의 근본 원인을 없애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