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일부 불안요소가 해소됐지만 특정 대기업의 경우 특별검사팀이 그룹 총수에 내린 출국 금지 조치가 여전히 풀리지 않으면서 국외 주요 현안 처리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더팩트 DB |
[더팩트 | 서재근 기자] '달리는 말에 채찍질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는 고사성어로도 잘 알려진 이 속담은 기세가 한창 좋을 때 힘을 가한다는 뜻으로 잘하는 사람 혹은 대상으로 하여금 작금의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노력하도록 다그치고 격려한다는 의미다.
'말에 올라탄 사람'과 사람을 등에 태우고 '달리는 말'을 재계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나라 살림의 중추를 맡고 있는 대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연신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정부는 기업들이 더 안심하고 경영활동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는 구조가 단단하게 자리잡는다면 투자와 고용은 물론 경제성장을 가늠하는 다양한 지표들의 수치도 긍정적인 신호를 보낼 것이다. 정부와 기업이 손을 잡고 한몸으로 목표를 향해 뛸 때 비로소 글로벌 시장에서 대외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재계의 분위기는 이와는 정반대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나라 밖에서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 이후 중국이 상식 밖의 경제보복에 여념이 없고,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자국보호 무역주의를 유지하는 미국은 한국을 대표적인 대미 흑자국으로 지목하며 무역 압박을 예고하는 등 국내 기업들은 그 어느 때보다 '내우외환'으로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나라 안에서는 대통령 탄핵과 파면, 그리고 대선 정국이라는 거시적인 정치 이슈에 발목이 잡혀 '4월 위기설'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대기업들의 경영 시계가 멈춰선 지 오래다.
그룹별 상황을 살펴보면 더 가관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된 삼성그룹은 '시계 제로'의 혼돈 상황을 맞고 있는 가운데 국가 안보가 우선이라는 일념으로 골프장 부지를 사드 배치를 위해 내어준 롯데그룹은 중국의 무역 보복으로 현지에 진출한 롯데마트 99곳 가운데 절반이 넘는 55곳이 문을 닫는 상황에 직면했다. 하지만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발이 묶이면서 현지 점검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이들 점포의 영업정지가 한 달만 넘어도 그 경제적 손실만 500억 원을 넘어설 것이라는 게 재계의 분석이지만, '보복은 없을 것이다'라고 자신했던 정부의 대응은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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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그룹은 주력 계열사인 SK하이닉스가 매각 규모만 25조 원에 달하는 일본 도시바 인수전에 뛰어들었지만, 그룹 수장인 최태원 회장(왼쪽)의 출국 금지로 인수 파트너 물색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롯데그룹 역시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무역 보복이 거세지고 있지만, 신동빈 회장의 발이 묶여 사태 수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무엇보다 SK그룹의 경우는 '반도체'라는 특정 사업 분야에서 기업을 넘어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격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 왔지만, 총수의 출국 금지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여 안타까움을 더한다. 그룹 수장인 최태원 회장이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환골탈태 수준의 변화와 혁신을 강조했지만, 정작 특검이 채운 출국금지 족쇄가 여전히 풀리지 않아 일련의 주문들이 공염불로 그칠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SK그룹은 매각 규모만 최대 25조 원으로 올해 글로벌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최대 '대물'로 꼽히는 일본의 도시바 인수전에 주력 계열사 SK하이닉스가 뛰어들었지만, 투자 결정권을 가진 '감독' 최태원 회장의 출국 금지와 수사로 인해 인수 파트너 물색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자칫하면 자국 우선의 일본과 자본을 앞세운 중국에 주도권을 넘겨줄 위기에 처해 있다.
업계에 따르면 도시바의 지난해 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은 약 18%로 삼성전자(약 37%)에 이어 세계 2위다. 10%가량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한 SK하이닉스가 도시바 인수에 성공한다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D램에 이어 낸드플래시분야에서도 한국 기업이 1, 2위에 오르며 '반도체 코리아'의 위상을 확고히 할 수 있다. 반면, 국외 경쟁사가 도시바의 새 주인이 된다면 낸드플래시분야에서 삼성이 지키고 있는 1위 역시 위태해질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10일 진행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당시 박 전 대통령과 그의 비선인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 행위에 대해 "헌법에 명시된 기업의 재산권과 기업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공동취재단 |
물론, 이 같은 우려를 두고 일각에서는 그룹 총수 개인이 초대형 M&A의 전 과정을 주관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의문부호를 달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2012년 하이닉스 인수를 진두지휘하며 오늘날 삼성전자에 이어 시가총액 2위 기업으로 성장시킨 총수의 노하우와 리더십은 '대어(大魚)'를 낚아야 하는 SK에 '선택'이 아닌 '필수' 조건이자 글로벌 파트너가 SK를 믿게끔 하는 신뢰의 원천이다.
상황이 이런 데도 사정 당국은 여전히 '대기업 때리기'에 여념이 없다. 숨이 차서 뛰기는커녕 걷지도 못하는 말에 채찍질을 해대는 것은 '격려'가 아닌 '폭력'이다. 정치이슈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그룹 총수의 발을 단단히 묶어두고, 정치권에선 '고용을 확대해라', '투자를 늘려라'는 식의 주문만 늘어놓는 것은 힘 잃은 말을 향한 가혹한 매질일 뿐이다.
지난 10일 헌법재판소에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에서 박 전 대통령과 그의 비선인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 행위에 대해 헌법에 명시된 기업의 재산권과 기업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판단했다. 지금 재계에 필요한 것은 글로벌 무대에서 자유롭게 경영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며 그것이 흔들리는 나라 경제를 위해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