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김호연기자] 프로야구팬들에게 한화 이글스와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실과 바늘처럼 항상 붙어다닌다. 하지만 둘의 상관관계는 한화의 전신인 빙그레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 4년이 지난 1986년 창단된 빙그레는 강력한 타선을 바탕으로 199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원조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멤버이자 '사이클링 히트의 사나이'로 불렸던 이강돈 현 청주기계공고 감독과 함께 옛 추억을 떠올려 보았다.
# 무서울 게 없었다!
1989년 '타격왕(고원부), 최다안타왕(이강돈), 타점왕(유승안)' 1990년 '최다안타왕(이강돈), 홈런왕(장종훈), 타점왕(장종훈)' 1991년 '타격왕(이정훈), 최다안타왕(장종훈), 홈런왕(장종훈), 타점왕(장종훈)' 1992년 '타격왕(이정훈), 홈런왕(장종훈), 타점왕(장종훈)'.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빙그레가 휩쓴 타격부문이다. 그리고 팬들은 당시 빙그레타선을 '다이너마이트타선'이라 칭했다.
'추억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묻자 이 감독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당시 빙그레의 타선을 일일히 열거하며 "라인업 모두가 정확도에 한방씩을 터뜨릴 수 있는 선수들이었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당시 빙그레만 피해가자는 말도 있었다"는 이 감독의 말에서 당시 빙그레 타선의 폭발력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주축 선수였던 이 감독에게도 천적은 있었다. 이 감독은 당시 해태의 좌완투수였던 김정수를 꼽았다. "키가 크고 투구 폼이 사이드스로우처럼 온다. 커브를 던지면 가슴으로 오는 듯 하다"며 직접 제스처까지 취해준 이 감독은 "공의 위력보다는 보다는 폼 때문에 무서웠다"고 고백했다. 당시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 삼성 감독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배트스피드에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무섭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 천적 해태 "대범하지 못했다."
원조 다이너마이트 타선이 폭발하던 시절 빙그레 역시 최전성기를 달렸다. 빙그레는 창단 3년만인 1988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 한 후 1989년 1991년 1992년 내리 최강의 자리를 넘봤다. 하지만 빙그레 앞에는 해태 타이거스(현 기아)라는 넘어야 할 큰 산이 있었다. 빙그레는 1992년을 제외한 3번의 시리즈를 모두 해태에 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만 했다.
왜 빙그레는 그토록 해태 앞에만서면 작아졌을까. 이 감독은 "대범하지 못했다"며 당시 빙그레의 패인을 분석했다. "특히 투수 맞대결에 있어 피해가는 작전이 오히려 역효과를 나타냈다. 선동열이 나오면 마치 게임 끝난 것처럼 지레 겁먹었던 것 같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해태에 비해 약했던 투수력도 이유로 꼽았다. "투수가 약했다. 마무리가 없었고 중간이 약했다"는 이 감독은 "이와 반대로 해태에는 선동열이란 확실한 마무리가 있었다"며 패인을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재밌는 일화도 설명했다. 이 감독은 "선 감독하고는 친군데 당시 한국에서 야구하면 안된다고 농담삼아 말했다. 미국으로 가든 일본으로 가든 가라고 말했다. 결국에는 갔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 첫 우승 "기뻤지만 아쉬움도 컸다"
"한국시리즈를 제패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 이 감독은 선수 시절 가장 아쉬운 순간으로 예상대로(?) 한국시리즈를 제패하지 못한 과거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와 함께 1999년 한화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에도 미련을 갖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유가 궁금했다. 1997년을 마지막으로 그라운드를 떠난 이 감독은 "힘이나 뭐나 떨어질 것이 없었다"며 좀 더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싶었던 당시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어 "우승하던 해가 처음 코치를 하던 해였다"는 이 감독은 "당시 코치로서 시리즈에서 맞붙을 상대팀들의 전력을 파악하고 다녔는데 선수를 해야지 코치를 하고 있으니 우승 순간 눈물이 났다"며 선수로서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지 못한 것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내뱉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어준 후배들에게는 항상 고마운 마음 뿐이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 "똑바른 야구 가르치겠다"
1994년을 끝으로 이 감독은 지난 5일자로 청주기계공고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은퇴 후 처음으로 자신의 팀을 갖게 된 셈이다. 각오가 궁금했다. 현역시절처럼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했다. "학생들이니까 기본기 위주로 잘 잡아주고 싶다"는 이 감독은 "진정으로 야구를 이렇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야구라는 것을 가르치고 싶다. 지더라도 떳떳하게 할 수 있는 야구를 하고 싶다"며 앞으로의 청사진을 들려주었다. "앞으로 1년 후쯤이면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팬들에게 받았던 사랑을 학생들에게 돌려주겠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1987년 8월 27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빙그레와 당시 OB 베어스의 경기는 아직도 많은 올드 야구팬들의 눈에 선하다. 마지막 5번째 타석에서 우중간을 가르는 안타를 치고 죽기살기로 베이스를 돌던 이강돈. 기어코 3루타를 만들어내고 두 손 번쩍 들던 그의 모습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프로야구 역사상 두번째 사이클링히트. 단타부터 홈런까지를 모두 기록하며 자신의 이름 석자를 한국프로야구에 단단히 새겨넣었다. 제 2의 야구인생을 시작하는 그가 지도자로서도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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