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구의 역사] 너클볼
입력: 2017.07.09 04:00 / 수정: 2017.07.09 04:00
호이트 윌헬름
호이트 윌헬름

[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너클볼

구원투수로는 처음으로, 따라서 통산 150승 이상을 올리지 못한 투수로는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호이트 윌헬름이 메이저리거가 된 것은 1952년,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그러나 늦게 시작한 대신 49세가 되던 1972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그의 메이저리그 데뷔가 늦었던 것도, 투수로서 장수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너클볼과 관련이 있다.

너클볼은 손톱이나 손가락 끝으로 공을 잡고 공에 회전이 거의 걸리지 않도록 밀어내듯이 던진다. 회전을 극도로 줄인 공은 실밥 부분과 매끄러운 표면에 다르게 작용하는 공기저항의 불균형으로 인해 불규칙한 변화를 일으킨다.

춤추듯이 날아오는 너클볼은 모든 구종 가운데 타자가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공이다. 그러나 투수 역시 컨트롤하기 가장 힘든 공이기도 하다. 공의 방향이 아주 조금만 달라져도 그 결과에 엄청난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다면 나이가 들어서도 투수로 활동할 수 있다. 공에 무리하게 회전을 걸 필요가 없어서 팔에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너클볼 투수가 처음부터 너클볼을 주무기로 던진 경우는 드물다. 투수로서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 너클볼을 선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1970년부터 1994년까지 선수 생활을 한 찰리 허프는 원래 내야수였는데 피칭에 재능을 보여 투수로 변신했다. 그러나 마이너리그에서 팔을 다치는 바람에 선수 생명이 끝날 위기를 맞았다. 그는 너클볼을 던지기로 했고 결국 메이저리그에서 25시즌을 보내며 통산 200승을 넘겼다.

1할대 타율의 마이너리그 내야수였던 팀 웨이크필드도 빅리그 무대에 서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너클볼을 배워 투수로 전향했고 1990년대를 대표하는 너클볼러가 됐다.

너클볼 투수로 2012년 사이 영 상을 수상한 R.A. 디키는 대학 시절 미국 대표로 애틀랜타올림픽에 출전했고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지명될 정도의 유망주였다. 그러나 팔꿈치에 이상이 발견되고 패스트볼의 스피드가 눈에 띄게 떨어지면서 평범한 투수로 전락하자 결국 너클볼러의 길을 걷게 됐다.

디키는 허프에게 너클볼을 지도받은 적이 있다. 허프는 디키에게 "너클볼을 던지는데는 하루면 충분했지만 스트라이크를 마음대로 던질 수 있기까지는 평생이 걸렸다"고 말했다.

이들과는 달리 윌헬름은 처음부터 너클볼을 던지는 투수였다. 윌헬름은 어릴 때부터 너클볼에 빠져있었다. 완벽한 그립을 만들기 위해 테니스공을 이용했는데 보풀이 잔뜩 일어 못쓰게 될 때까지 연습하곤 했다.

그는 독학으로 너클볼을 배웠다. 너클 커브(너클볼 그립으로 공을 잡고 패스트볼처럼 던지는 것으로 현재의 너클 커브와는 다르다)로 유명했던 프레디 피츠시먼스와 1940년대 너클볼 붐을 일으켰던 에밀 레너드에 대한 책을 읽으며 스스로 공을 개발했다. 그는 이미 이때부터 자신만의 스트라이크존을 설정해 놓고 그곳에 너클볼을 던질 수 있도록 수없이 공을 던졌다.

윌헬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이너리그 팀 무어스빌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선발투수였던 그는 무어스빌에서 두 시즌 연속 20승 이상을 기록하는 등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1952년 뉴욕 자이언츠에 입단할 때까지 마이너리그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오랫 동안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내가 너클볼 투수였다는 것뿐이다. 아무도 나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가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레오 듀로서 감독이 너클볼러가 구원투수에 적격이라고 생각한 덕이었다. 너클볼은 와인드업이 필요 없고, 투구 동작이 단순하기 때문에 불펜에서 오래 몸을 풀지 않아도 된다. 언제든지 등판할 수 있고 연투도 가능한 것이다.

윌헬름은 메이저리그 첫 시즌에 15승 3패 11세이브를 기록했다. 평균자책점 2.43으로 신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부문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내셔널리그 올해의 신인 투표에서 그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구원투수 조 블랙에게 밀려 2위에 그쳤다. 블랙의 성적은 15승 4패 15세이브. 윌헬름은 평균자책점은 물론 투구이닝에서도 앞섰지만 최고 신인의 영예를 안지 못했다.

당시 너클볼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다. 너클볼에 곤혹스러워 한 타자들은 물론 기자들도 정정당하지 못한 투구라고 생각했다. 너클볼은 '진짜 피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윌헬름은 20년 간 메이저리그에서 자이언츠를 시작으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볼티모머 오리올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시카고 컵스, LA 다저스 등 9개 팀을 전전했다. 그가 이렇게 많은 팀을 옮겨다녔다는 것은 너클볼을 완벽하게 구사해 꾸준한 성적을 내기 어렵다는 것, 좋은 너클볼 투수라 하더라도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너클볼 투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1957년 세인트루이스는 윌헬름을 클리블랜드로 팔아넘겼다. 윌헬름은 이듬해 클리블랜드에서 처음으로 선발투수로 기용됐지만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러자 클리블랜드는 그를 방출했다. 그때 그는 35세였다. 보통의 투수라면 은퇴해야 할 나이였지만 그에게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의 다음 팀은 볼티모어였고 폴 리처즈가 감독이었다. 리처즈는 윌헬름을 선발과 구원 양쪽 모두 기용했다. 1958년 윌헬름은 볼티모어에서 세 번째 선발 등판 만에 양키스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그는 99개의 공을 던졌는데 그 가운데 87개가 너클볼이었다. 볼티모어는 1-0으로 이겼는데 윌헬름의 전담 포수였던 거스 트리안도스가 결승 홈런을 쳤다.

리처즈는 너클볼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다. 뉴욕 자이언츠의 후보 포수였던 시절 그는 칼 허벨과 돌프 루케 등 베테랑 투수들의 볼을 받아주면서 피칭 기술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그 투수들 가운데 한 명이 윌헬름이 어린 시절 동경했던 피츠시먼스였다.

리처즈는 1936년 자이언츠에서 쫓겨나 마이너리그 팀 애틀랜타에 내려갔는데 그곳으로 너클볼 투수 레너드가 왔다. 레너드는 다저스에 4년 간 있었는데 그의 너클볼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포수들이 그 공을 요구하지 않는 바람에 투수로 성공하지 못했다. 리처즈는 자기가 너클볼을 받아줄 테니 얼마든지 던지라고 했다. 리처즈의 도움을 받은 레너드는 다시 메이저리그로 복귀해 1939년 20승을 올리는 등 강력한 너클볼러로 이름을 떨쳤다. 윌헬름에게 너클볼 투수를 꿈꾸게 했던 바로 그 레너드였다.

윌헬름과 함께 메이저리그에서 너클볼로 가장 성공한 투수인 필 니크로도 리처즈의 도움을 받았다. 니크로는 윌헬름이 양키스전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바로 그 해에 마이너리그 팀 밀워키 브레이브스에 입단했는데 아마추어로는 뛰어난 수준이었던 그의 너클볼은 프로에서 전혀 통하지 않았다. 니크로는 리처즈의 지도 아래 너클볼을 가다듬었고 결국 너클볼 투수로는 유일하게 300승 투수가 됐다.

이처럼 너클볼에 애정이 깊었던 리처즈는 윌헬름의 받는 트리안도스를 위해 사이즈가 큰 포수 미트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가 윌헬름의 공을 자주 뒤로 빠뜨려 타자를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으로 살려보내거나 주자가 있을 때 진루를 시키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너클볼은 받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느린 까닭에 도루를 허용할 위험도 높다. 포수들이 너클볼 투수를 기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962년 시즌이 끝난 뒤 트리안도스가 트레이드되면서 볼티모어에는 윌헬름의 공을 받아줄 포수가 없게 됐다. 윌헬름도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옮겨야 했다. 그는 42세 때인 1965년 144이닝을 던지면서 20세이브를 올렸는데 포수였던 J.C. 마틴은 33개의 패스트볼로 리그 신기록을 세웠다.

이름과는 달리 공을 잡을 때 손가락 관절을 이용하는 너클볼 투수는 없다. 그런데 왜 너클볼일까? 20세기 초반 냅 러커, 루 모런, 에디 시콧, 에드 서머스 등이 너클볼을 처음 던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은 블랙삭스 스캔들에 연루됐던 시콧을 최초의 너클볼 투수로 본다.

너클볼은 최대한 공의 회전을 죽여야 한다. 회전이 많이 걸린 너클볼은 배팅 연습용 공만도 못할 수 있다. 시콧은 이런 느린 회전의 투구를 하기 위해 공을 손가락 관절, 즉 집게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사이에 끼워 던졌다. 그의 별명이 '너클'이었다.

그 이전에 19세기 투수였던 토드 램시가 너클볼을 던졌다는 주장도 있다. 램시는 가운뎃손가락의 힘줄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이 때문에 공을 던질 때 가운뎃손가락을 쓰지 않고 집게손가락과 약손가락의 안쪽으로 공을 잡았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그립이 공이 회전을 먹지 않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malishi@tf.co.kr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이메일: jebo@tf.co.kr
▶뉴스 홈페이지: http://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
인기기사
실시간 TOP10
정치
경제
사회
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