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융 /KBO 한국프로야구화보 |
[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김일융과 스크루볼
삼성은 1985년 2월 미국 플로리다의 베로비치에 있는 LA 다저스의 스프링캠프 다저타운에서 동계훈련을 했다. 국내 프로야구단 최초의 미국 전지훈련에서 가장 큰 소득이 있었던 선수는 재일동포 투수 김일융이었다.
김일융은 1970년대 후반 일본프로야구의 명문 요미우리의 에이스였다. 1977년과 1978년 센트럴리그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고, 1979년에는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의 주무기는 크게 휘어지는 커브였다. 1970년대 센트럴리그에는 커브가 뛰어난 투수가 3명 있었다. '에나쓰의 21구'로 유명한 에나쓰 유타카, 파워 커브를 앞세워 3차례 노히트노런(퍼펙트게임 1차례)을 달성한 소토코바 요시로, 그리고 김일융이었다.
그러나 김일융은 1980년대 들어 팔꿈치 부상의 영향으로 부진에 빠졌고 출장 기회가 줄어들었다. 결국 1983년 시즌이 끝난 뒤 요미우리를 떠나 한국프로야구에서 새로운 선수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그는 1984년 정규시즌 16승을 올리며 삼성의 한국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다. 롯데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3승을 따내며 활약했지만 혼자 4승을 거둔 최동원의 역투에 밀렸다. 특히 7차전에서 3점 홈런을 허용하며 패전투수가 됐다.
삼성이 4-3으로 앞선 8회초 1사에 주자가 없는 가운데 왼손 투수 김일융은 3명의 오른손 타자를 맞게 됐다. 볼카운트 3볼 1스트라이크로 몰린 상황에서 커브를 던지다 김용희에게 안타를 내줬다. 다음 타자 김용철에게 던진 커브도 안타가 됐다. 커브로 연속 안타를 허용한 김일융은 유두열에게 빠른 패스트볼로 승부하다가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을 얻어맞고 말았다. 김일융에게는 오른손 타자를 상대할 승부구가 필요했다.
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뼈아픈 경험을 한 김일융이 베로비치에서 주목한 것이 바로 스크루볼이었다. 1981년 다저스의 루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가 '페르난도마니아' 돌풍을 일으켰던 바로 그 공. 발렌수엘라는 1984 시즌에는 12승 17패로 다소 부진했지만 여전히 다저스의 주축 투수였다.
김일융은 베로비치에서 커브의 반대 방향으로 변화하는 스크루볼을 익히면서 새로운 투수로 거듭나게 됐다. 좋은 커브를 던지는 왼손 투수가 스크루볼까지 갖게 된 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과 같았다. 김일융은 그해 김시진과 함께 나란히 25승을 올리며 삼성에 한국시리즈 없는 통합 우승을 안겼다.
김일융은 1987년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스 유니폼을 입고 일본프로야구에 복귀했다. 그해 2월 나가시마 시게오가 다이요의 오키나와 캠프를 찾았다. 3년 전 김일융에게 한국행을 추천했던 나가시마는 달라진 면모를 발견했다. 김일융이 스크루볼을 던지는 모습을 본 나가시마는 "그 공을 남들 보는 데서 던지는 것은 아직 이르다. 감춰둬라."라고 조언했다.
36세의 나이에 일본 무대에 복귀한 김일융은 4차례의 완봉을 포함해 11승을 올리며 활약, 컴백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92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복귀 후 37승을 추가했다. 외환 사정 악화로 해외 전지훈련이 중단되면서 삼성이 다시 베로비치 다저타운을 찾은 것은 1992년이었다. 단 한 번의 기회가 김일융의 인생을 바꾼 것이다.
일본프로야구에서 처음으로 스크루볼을 던진 투수는 다카하시 가즈미다. 그는 1960년대 후반 요미우리의 V9 시대에 호리우치 쓰네오와 함께 팀의 주력 투수로 활약했다. 오른손 투수인 호리우치는 커브, 왼손 투수인 다카하시는 스크루볼로 유명했다.
1965년 요미우리에 입단했을 때는 다른 왼손 투수들처럼 커브만을 던졌다. 2년째에 투수코치로부터 슈트를 던져보라는 조언을 받고 새로운 공을 개발하게 됐다. 슈트는 오른손 투수가 던졌을 때 오른쪽 타자의 몸쪽으로 파고드는 공으로 스크루볼과 변화 방향이 같다. 처음에는 커브의 일종으로 여겼으나 구속이 빠르기 때문에 역 방향 슬라이더라는 별개의 구종으로 인식해왔다.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궤적이 비슷한 투심 패스트볼과 동의어로 쓰고 있다.
다카하시는 오른쪽 타자의 바깥쪽으로 달아나는 공으로 쉽게 내야 땅볼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른손 투수의 커브를 염두에 두고 3년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새로운 공을 개발했다. 그립을 조정하면서 스피드가 줄었기 때문에 다카하시는 그 공을 '느린 슈트'라고 불렀다. 그는 1971년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친선경기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쿠바 출신 투수 마이크 쿠엘라가 던지는 스크루볼을 보고 자신의 것과 같은 공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다카하시 이후에는 주니치의 왼손 투수 야마모토 마사가 스크루볼을 던졌다. 주니치는 1988년 2월 베로비치의 다저타운에 동계 캠프를 차렸는데 훈련이 끝난 뒤 야마모토를 비롯해 즉시 전력이 아닌 신예 선수 5명을 야구 유학을 위해 남겨 두고 왔다.
야마모토는 발렌수엘라가 피칭 연습 때 스크루볼을 던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야마모토는 마이너리그 팀 동료에게 스크루볼 던지는 방법을 배워 실전에서 사용하며 가다듬었다. 그해 주니치의 투수 사정 때문에 예정보다 일찍 귀국한 야마모토는 8경기에 등판해 5승 무패, 평균자책점 0.55를 기록하며 팀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야마모토는 스크루볼을 결정구로 사용했는데 그 자체의 위력보다는 베로비치에서 제대로 배운 커브를 함께 구사했기 때문에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다카하시는 야마모토의 경우는 변화가 크지 않다며 "저것은 스크루볼이 아니라 싱커"라고 말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스크루볼에 대해 '왼손 투수가 던지는 싱커'라고 하기도 하지만 엄밀하게는 서로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