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이병규. 더팩트DB |
[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1916년 메이저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외야수였던 잭 그래니가 자신의 유니폼에 숫자를 써넣었다. 톱타자였던 그는 소매에 자신의 타순을 의미하는 '1'을 새겼다. 그해 그는 자신의 선수 경력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숫자가 너무 작아 눈에 띄지 않았고 사람들이 별로 알아주지 않자 이듬해 소매에서 숫자를 없앴다. 그래니 이전에도 소매에 숫자를 써넣은 선수가 있었다.
팀 차원에서 야구팬들이 선수들을 잘 구분하도록 하기 위해 소매에 번호를 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선수들이 죄수 같아 보인다며 불평하고, 관중의 야유와 상대팀 선수의 욕설을 우려해 숫자를 다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유니폼 번호를 완전히 정착시킨 팀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뉴욕 양키스다. 1929년 인디언스와 양키스가 눈에 잘 띄도록 선수들의 등에 큼직한 숫자를 붙였다. 인디언스는 홈경기 때만 번호를 붙인데 비해 인기가 높았던 양키스는 홈과 원정 모두 번호를 달았다. 당시의 등번호는 타순과 일치했다. 양키스의 경우 3번타자 베이브 루스가 3번, 4번타자 루 게릭이 4번을 다는 식이었다. 양키스의 자랑이었던 게릭이 1939년 은퇴하면서 그의 번호는 메이저리그 최초로 영구결번이 됐다.
1968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카를로스 메이는 등에 자신의 생일을 써넣은 최초의 선수가 됐다. 화이트삭스가 그해 선수들의 등에 이름을 붙이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성 메이(May)와 번호 17을 등에 달았는데 그의 생일이 5월 17일이었다.
일본야구에서 최초로 유니폼에 등 번호를 단 것은 요미우리의 전신인 다이니혼도쿄야구구락부가 1935년 미국을 방문해 친선경기를 벌였을 때부터다. 당시 일본 선수들은 一, 二, 三 등 한자 숫자를 등에 달았는데 미국 관중이 +, -, = 등의 수학기호로 오해해 그 이유를 궁금해 했다고 한다.
일본프로야구에도 위대한 선수들이 배출되면서 영구결번이 많이 나왔지만 선수와 관련이 없는 결번도 있다. 지바롯데는 26번이 영구결번이다.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선수 숫자가 25명이므로 팬들이 26번째 선수라는 의미에서 이 번호를 비워놓았다.
LG 트윈스가 지난해 은퇴한 이병규의 현역 시절 등번호 9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한다고 20일 밝혔다. LG의 영구 결번은 2000년 은퇴한 투수 김용수(41번)에 이어 두번째, 프로야구 전체로는 13번째다.
이병규는 1997년 입단 이후 일본 주니치에서 뛴 3년을 제외하고 LG에서만 17년을 활약한 프랜차이즈 스타다. 골든글러브를 7차례 수상했고 타격왕에도 두 차례나 올랐다. 넓은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면서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했고 10연타석 안타의 기록도 세웠다.
유니폼 번호는 원래부터 관중이 선수들을 구분하기 쉽도록 만든 것이지만 이병규에게는 더욱 특별했다. 같은 팀에 동명이인 후배가 있었던 까닭에 둘을 구분하는 용도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큰' 이병규와 '작은' 이병규로도 구분했지만 '9번' 이병규와 '7번' 이병규로 불렀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는 번호가 곧 이름이었다.
한대화로부터 이병규로 넘어간 LG의 9번은 이병규가 일본에 진출한 뒤 한동안 주인이 없다가 오지환이 쓰게 됐다. 그리고 이병규가 국내에 복귀한 뒤에는 다시 그의 것이 됐다.
이병규는 주니치에서는 7번을 달았다. 같은 외야수인 이노우에 가즈키가 9번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니치는 이병규가 LG에서 달았던 9번을 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하고 7번을 선택했다. 7번은 그에 앞서 주니치에서 활약했던 이종범이 썼던 번호다. 그리고 한국프로야구에서 11번째로 영구결번된 숫자이기도 하다.
메이저리그에서 9번을 달았던 선수들을 살펴보면 빛나는 이름들이 적지 않다. 이병규처럼 외야수였던 테드 윌리엄스와 로저 매리스의 유니폼 번호가 9번이었다. 이병규가 선수로서 이룬 업적은 대단하다. 하지만 팬들은 이병규의 재능이라면 프로야구에 좀더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LG의 9번이 선수 생활 마지막 시즌에 단 한 타석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안타깝다. 그래서 이번 영구결번 지정은 그 자신에게도 팬들에게도 더욱 의미깊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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