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구의 역사] 죽은 공, 살아 있는 공
입력: 2017.04.22 05:00 / 수정: 2017.04.22 05:00

[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1장 데드볼 시대(1901-1919)-에드 월시의 스핏볼

죽은 공, 살아 있는 공

야구공은 코르크, 고무 또는 이와 비슷한 재료로 만든 작은 심에 실을 감고, 흰색의 말가죽 또는 쇠가죽 두 쪽으로 이를 싸서 단단하게 만든다. 중량은 5~5¼온스(141.77~148.8g), 둘레는 9~9¼인치(22.9~23.5㎝)로 한다.-야구규칙 1.09

초기의 야구공은 손으로 만들었다. 작은 납 덩어리를 노끈으로 묶고 샤모아나 양 같은 동물 가죽으로 싸서 만들었다. 납 말고도 작은 돌이나 총알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야구공의 심으로 납 대신에 고무를 쓰게 되면서 무게가 가벼워졌다. 구두 수선공이 낡은 신발에서 나온 고무 조각을 둥글게 뭉쳐 실을 감은 뒤 가죽이나 천으로 감싸 공을 만들었다. 어떤 곳에서는 고무 조각 대신 철갑상어의 눈알로 공을 만들기도 했다. 1840~1850년대에 공을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투수들이 자기가 던질 공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초기의 공들은 지금에 비해 가볍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경기의 양상도 달랐다. 야수가 공을 던져 주자의 몸을 맞혀서 아웃시 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아무리 어깨가 강한 선수라도 외야에서 투수에게 공을 직접 연결할 수 없었고, 1849년(또는 1850년)에 유격수라는 새로운 포지션이 탄생하게 됐다.

여기저기서 손으로 직접 만들다 보니 모양이나 무게,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1850년대 중반, 뉴욕의 야구 클럽들이 중량과 크기를 표준화를 시도하면서 야구공은 커지고 무거워졌으며 단단해졌다. 1860년대까지 야구공의 진화는 계속됐고 야구 규칙도 달라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태그 아웃이다. 공이 단단해졌기 때문에 주자를 직접 맞힐 수는 없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공이 같지는 않았다. 심에 고무를 좀 더 넣고 실로 단단히 감은 '라이브볼'이 있었고, 고무를 덜 넣고 느슨하게 감은 '데드볼'이 있었다. 홈팀은 자신들의 강점과 상대팀의 스타일에 맞춰 공을 준비했다. 상대팀에 장타자가 많다면 당연히 데드볼을 내놓았다.

꾸준한 표준화 시도에도 여전히 차이가 있던 야구공은 1876년 현재와 같은 크기와 무게로 완전히 통일됐다. 이후 겉모양에서 달라진 것은 공의 거죽이 말가죽에서 소가죽으로 바뀐 것뿐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공이 죽어 있는가, 아니면 살아 있는가, 반발력이었다.

메이저리그 야구 역사에서 1919년까지를 '데드볼 시대'라고 부른다. 반발력이 약한 공을 사용한 이 시기는 피칭의 황금기였다. 타자들은 공을 외야로 날려보내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1루수들은 한 경기 27개의 자살(풋아웃) 가운데 20개 이상을 쉽게 기록하곤 했다. 당연히 홈런과 득점이 적었고 월터 존슨, 사이 영, 크리스티 매튜슨,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등의 투수들이 이 시대를 지배했다.

가장 득점이 적었던 1908년에는 팀당 평균 득점이 3.4점에 불과했다. 투수들은 드물게 나오는 홈런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투구수도 적었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던질 수 있었다. 50경기에 등판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선발로 나섰다 하면 90% 정도는 완투를 했다. 그리고 한 시즌에 25승을 올리는 것이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1910년 시즌이 끝날 무렵에는 고무심 속에 코르크를 박은 공이 등장했다. 공의 반발력이 커져 타구의 비거리가 늘어나게 되자 일시적으로 홈런과 득점이 증가했다. 그러나 공격이 지나치게 증가했다는 지적에 따라 실을 느슨하게 감는 방법으로 반발력을 죽이면서 투수의 강세는 다시 지속됐다.

야구공이 이 시기 야구의 양상을 결정지었는데 문제는 반발력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공이 없어지거나 완전히 못쓰게 되지 않는 한 경기 내내 공 하나로 버티는 것이 보통이었다. 가죽이 찢어지면 경기를 잠시 중단하고 수선해 계속 썼고, 망가진 공도 모양을 잡아 재활용했다.

1872년에는 팀의 주장이 망가진 공의 교체를 요구할 수 있게 됐다. 공을 잃어버리면 공을 찾느라 경기가 길어지곤 했다.

1876년까지는 공을 잃어버려도 5분 간 공을 찾아 보고 그래도 찾지 못해야 잃어버린 것으로 쳤다. 이렇게 했던 이유는 공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공 하나에 3달러였는데 지금으로 치면 80달러가 훨씬 넘는 금액이었다. 구단주들은 꼭 필요하지 않으면 새 공을 사는데 돈을 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상태가 나빠진 공은 더 부드러워졌고 자연히 타자가 치기 더 힘들어졌다. 뉴욕 자이언츠의 외야수로 1912년 월드시리즈에서 평범한 플라이를 놓친 것으로 유명한 프레드 스노드그래스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하얀 새 공은 구경하기 힘들었다. 공이 스탠드로 들어가 운동장 관리인들이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게 돼야 심판이 새 공을 꺼내주는 식이었다. 심판이 새 공을 던져주면 투수는 받지 않고 슬쩍 비켜서버렸다. 내야수들을 한바퀴 거쳐서 투수 손에 들어오면 벌써 숯덩어리처럼 새카맣게 됐다. 모두들 씹는 담배나 감초 따위를 질겅거리고 있다가 글러브 속에 침을 뱉고나서 볼을 받으니 온갖 지저분한 게 다 묻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볼이 새카맣게 되면 스탠드의 그림자가 내야를 덮고 있을 땐 투수가 던지는 볼이 타자에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공을 '조작'할 수도 있었다. 공에 이물질을 묻히거나 변형을 가하는데 대해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투수들은 공에 침을 발라 회전을 변형시키는 스핏볼, 사포 등으로 공을 갈아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불규칙한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에머리볼, 글러브나 유니폼 등으로 공을 문질러 변화를 심하게 만드는 샤인볼, 공의 실밥에 진흙을 묻히는 머드볼 등으로 타자를 상대할 수 있었다.

퀵 피치도 성행했다. 타자가 타격 준비를 갖추기 전에 공을 던지는 것인데 나중에 부정투구로 금지됐지만 당시에는 하나의 피칭 기술이었다. 타자가 준비 없이 타석에 들어섰다간 갑자기 날아드는 공에 꼼짝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패트 플래허티, 조 맥기니티, 클라크 그리프스 등이 퀵 피치의 명수였다. 지금은 주자가 있을 때 투수가 이런 퀵 피치를 하면 보크가 선언된다.

공 자체의 문제 외에 투수와 타자의 대결에 영향을 미친 것은 한 가지 중요한 규칙의 변화였다. 1901년 내셔널리그는 야수에게 잡히지 않은 파울볼도 투 스트라이크까지는 스트라이크로 카운트하는 규칙이 생겼다. 그 이전까지는 이런 공은 카운트하지 않았다. 1901년 메이저리그로 활동을 시작한 아메리칸리그는 같은 규칙을 1903년에 도입했다.

이같은 변화는 타격의 침체를 가져왔다. 1900년 .279였던 내셔널리그 평균 타율은 파울을 스트라이크로 잡기 시작한 1901년 .267로 하락했다. 아메리칸리그도 1902년 .275에서 1903년 .255로 떨어졌다. 투수의 투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타자들은 매튜슨이나 영 같은 컨트롤이 뛰어난 투수들에게 쉽게 아웃당할 수밖에 없었다. 투수들이 컨트롤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1910년대는 제구력의 시대가 됐고 투수들이 경기를 주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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