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초대석] '붉은 대추' 양해영 총장 "암 수술 두 번, 야구로 극복"<2>
입력: 2016.01.28 05:00 / 수정: 2016.01.28 10:52

붉은 대추를 닮은 양해영 KBO 사무총장이 인터뷰 직전 사무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도곡동=문병희 기자
'붉은 대추'를 닮은 양해영 KBO 사무총장이 인터뷰 직전 사무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도곡동=문병희 기자

[더팩트 | 대담=박순규 편집국장, 정리=이성로 기자]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우리 시대의 문장가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란 시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유달리 양해영(55) KBO 사무총장의 인생이 오버랩된다. 어느 인생치고 남들에게 털어놓고 싶은 사연 한 줄이 없겠는가마는 그의 '야구 인생' 자체는 여느 사람과 달리 온갖 풍상을 오롯이 견뎌낸 붉은 대추 한 알과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장석주 시인은 이 시를 벼락처럼 썼다고 하는데 그게 그냥 써졌을 리는 없다. 하루 8시간 책을 읽고, 1년에 1000여 권의 책을 독파하는 노력과 열정, 3만 권의 장서와 약 80여권의 책을 쓴 '내공'이 바탕을 이뤘으리라.

마찬가지로 양 총장의 28년 KBO 인생에도 야구가 없었다면 끝내 땅바닥에 떨어지고 만 낙과처럼 시들어버릴 위기가 많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죽을 만큼의 아픔도 견디고 극복하게 하는 야구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찾았다고 한다.

◆1988년의 추억

-얼마 전에 '응답하라 1988' 드라마가 끝났다. 바로 그 1988년에 KBO에 입사를 했는데, 어느덧 28년째다. 1988년에 기억나는 것은 없나.

'응답하라 1988'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1988년이 기억에 남는 해인 건 분명하다. 우선 그 해에 KBO에 발을 들여놓았다. 첫 직장이다. 지금까지 다닐 줄은 몰랐지만 그때는 마냥 설렜다. 야구와 관계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 88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에피소드가 많다. 올림픽 때다. 이상하게 경기장에 사람은 없는데 표는 이미 다 팔린 거다. 표를 미리 구할 수 없었다. 야구단체에서도 표를 구하지 못했다. 당시 야구는 시범 종목이었다.

한일전도 아닌데 표 구하기가 힘들었다. 근무부서인 총무부에 표를 구해오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표는 이미 매진이었다. 방법을 찾다 보니 을지로 입구의 외환은행 앞에 가면 암표상들이 있다고 해서 거기로 찾아 갔다. 당시에는 외환은행에서 올림픽 표를 팔았다. 외한은행 앞에 가니 역시나 암표상이 있었다. 야구장 앞에서 낯을 익힌 얼굴이 있었다. 그 암표상도 나와 눈이 마주치니 웃었다. 그래서 암표상에게 표를 구했다.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게 그 표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경기장에 관중은 다 차지 않았다.

-KBO 입사 초기에 맡은 일은.

처음에는 총무부에서 관리,회계,기획 업무를 모두 담당했다. 당시에는 KBO 사무국 조직 내에 총무부와 운영부밖에 없었다. 운영부는 경기 진행과 홍보에 관한 모든 부분을 맡고 나머지는 총무부가 다 맡아 처리했다. 지금은 40명 넘게 인원이 늘었지만 당시 직원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빌딩 관리부터 다양한 지원업무와 행사까지 전부 다 했다고 보면 된다. 도곡동 KBO 건물은 빙그레 이글스가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30억 원의 가입금 대신 대지와 건물을 지어 대납한 것인데, 이 건물 관리를 하는 것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27년이 흘렀는데, 지금 이 건물 가치는 180억 원 정도 된다고 한다. 6배 정도가 올랐다. 내 가치가 6배 정도 올랐는지는 모르겠다.(하하)

◆두 번의 암 수술, 그리고 깊어진 야구 사랑

-두 번의 암 수술 후 완치 판정을 받은 걸로 알고 있다. 음주 자리가 많은 홍보 업무 때문이었나? 또 어떻게 그 어려운 시기를 극복한 것인가.

사실 몸 관리를 잘못했다. 젊었을 때 젊음의 소중함을 잘 몰랐다. 암 선고를 두 번 받았다. 2005년부터 몸이 많이 피곤하다고 느꼈다. 2006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대회 중에 오른쪽 어깨쪽에 마비가 왔다. 중풍이 온 줄 알았다. 미국 대회 기간 중이라 LA에서 한의원에 갔는데 효과가 없었다. 한국에 온 뒤 병원에서 검진을 하니 목 디스크라고 했다. 그래도 계속 불편함은 가시질 않았다. 다음 달 건강검진을 했는데 직장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순간 멍했다. 3기가 뭔지 몰랐다. 암이라고 하니 당시 암이면 다 죽는다고 생각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인생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하일성 사무총장에게 검진 결과를 얘기했다. 일단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하니 아는 병원이 있냐고 물어봐서 없다고 했다. 그러자 하 총장이 바로 유명한 S대학병원을 소개해줘 수술을 받았다.

-본인도 충격이 컸겠지만 주위에서도 무척 놀랐겠다.

진단을 받고 일주일 뒤에 입원하게 돼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워낙 표현을 잘 안 하는 성격이라 주위에서도 몰랐다. 입원하기 전날 밤에 아내에게 솔직히 말했다. 그때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서로 말을 하지 못했다. 평소 잘 얘기를 하지 않는 편이라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편인데, 당시에는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수술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암 크기가 작다며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담당 의사가 조직 검사 결과를 보더니 좀 안 좋다고 항암치료를 해야한다고 했다. 그런데 치료 대기자가 많아 항암치료를 한 달 뒤에나 할 수 있다고 하더라. 죽을지 살지 모르는데 치료를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하니 정말 앞이 캄캄했다.

-음, 한 달을 기다릴 수 있나. 다른 병원은 찾아보지 않았는가.

사람이 참 당황하면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암 선고의 충격이 머리를 때리니 암 생각 이외에 나머지는 모두 백지장이 됐다. 1차 수술을 하고 난 뒤에야 친구가 유명 대형 병원의 대장암 전문의였다는 것이 생각났다. 퇴원하고 바로 전화했다. 친구가 바로 오라고 했다. 거기서 항암 치료를 받았는데 2년 뒤에 재발했다. 친구가 수술을 정말 잘 해줬다. 주변에서는 (의사)친구가 그토록 세심하게 수술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할 정도였다. 항암치료를 잘 받아 수술 후 5년이 지난 2013년에 완치판결을 받았다.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금메달을 목에 걸고 환호하는 선수들. 당시 양해영 KBO 사무총장은 직장암 2차 수술을 받고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다./서울신문 제공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금메달을 목에 걸고 환호하는 선수들. 당시 양해영 KBO 사무총장은 직장암 2차 수술을 받고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다./서울신문 제공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어떻게 극복했나?

항암 치료 자체가 힘들었다. 손발이 갈라지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러나 더 힘든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육체적인 고통은 이길 수 있는데 정신적인 부분은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하기도 하는데 나는 야구로 희망을 찾았다. 2008년 2차 수술을 해 베이징 올림픽에도 못갔다. 회사 병가가 규정상 30일 있는데 두 번 다 30일만 쉬고 바로 일터로 복귀했다. 주위에선 다들 독한 사람이라고 했다. 베이징올림픽 당시에는 집에서 TV로 경기를 봤다. 그때는 2002한일월드컵 이후라 야구가 침체돼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야구를 살리느냐를 놓고 고민했을 때다. 동네엔 온통 축구만 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선전을 하자 금방 분위기가 바꼈다. 야구경기를 하는 날이면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동네 주차장에서도 아이들이 야구를 했다. 좋은 기회다 싶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작은 아이가 동네 클럽에서 축구를 했다. 축구하는 학부모들에게 '내가 야구를 가르쳐도 되겠나'라고 물어봤는데 모두 좋다고 했다. 직접 야구를 가르치고, 야구붐이 일어 아픔도 잊을 수 있었다. 야구가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것이다.

-당시에는 치료 중이었을텐데.

그때 배 오른쪽에 대변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항문을 쉬게 해줘야 했다. 한 6~7개월 정도 차고 있었다. 그거 차고 아이들 야구를 가르쳤다. 당시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3~4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연식공으로 야구를 가르쳤다. 잘 하는 아이들은 리틀 야구 보냈다. 이후 야구붐이 일어났고, 동네에 축구 클럽이 없어졌다. 2009, 2010년 학교 운동장에는 거의 대부분 야구를 했다.

-그러고 보면 스포츠도 참 바람을 많이 탄다. 실제로 국제 대회 성적이 좋고 매스컴의 화제를 독차지하면 스포츠용품 판매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사실인 것 같다. 지금도 쌍문동에서 살고 있나?

결혼을 하면서 신접살림을 신림동에 차린 뒤 쭉 거기서 살았다. 동네 야구를 가르친 곳도 신림동이었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미림여고쪽으로 가는 방향의 언덕에 있는 아파트였는데 여러모로 정이 든 곳이다. 무엇보다 병도 거기서 나았고, 리틀야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된 계기도 신림동 환경과 맞물려 있다. 어찌됐든 한국 야구가 장기적으로 발전하려면 저변이 튼튼해야 하고 야구를 좋아하는 어린 친구들이 많아야 하는데, 그 가능성을 본 곳이 바로 신림동이었다. 작년에 여러가지 사정으로 사당동으로 이사했다.

-일반 직장인처럼 정시 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업무상 출장 음주 자리도 많았을 텐데 가족들이 힘들었겠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가족들에게는 항상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아마 집사람이 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정상적으로 가정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혼한 뒤 월급을 집에 갖다주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다. 사람들을 상대하며 술을 마시는 데 거의 다 썼다. 회사 카드가 있었지만 항상 모자랐다. 생계는 집사람이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버는 돈으로 유지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교육비가 늘어나 그때부터 월급을 조금씩 주기 시작했다.

-정말 간 큰 남자다. 아무리 배우자가 야구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지, 집에도 늦게 들어가고 월급도 안 갖다주면서 나쁜 병과 싸우면서도 사는 걸 보면...지인 중에 한 분은 후배들과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늘 사모님이 차로 모시러 와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알고 보니 평소 처가를 제 집 드나들듯 하면서 챙긴 것이 비결이라고 하더라. 혹시 가정 평화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나.

(하하)그런 거라면 비슷한 게 있긴 있다. 결혼 후 10년 가까이 장모님을 모시고 신림동에서 살았다. 장모님이라고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형편이 되는 대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함께 살았다. 꼭 그런 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KBO입장에서 보면 2016년은 도약을 위한 기회의 해이자 위기의 해이기도 하다. 국내 최초의 돔구장인 고척돔에서 전천후 경기를 할 수 있게 됐으며 대구의 신축 구장인 삼성 라이온즈파크에서 경기가 열리게 돼 경기장 인프라 측면에서 여느 때보다 쾌적한 환경을 갖추게 됐다. 반면 추신수 류현진 강정호가 활약하고 있는 메이저리그에 박병호 김현수 등이 합류해 그야말로 메이저리그가 '안방 야구'를 점령할 가능성이 커졌다. 2016년 갖가지 변수에 대한 KBO 실무 총책임자로서의 생각이 어떤지는 <3>편에서 계속된다.

sungro51@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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