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 재일동포 야구 선수들, 그들은 '반 쪽발이'가 아니다
입력: 2015.03.07 07:00 / 수정: 2015.03.07 08:49
고마운 재일동포 야구 선수들. 한화 이글스 김성근 감독은 1959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 땅을 밟은 바 있다. 영구 귀국한 뒤 50년이 넘는 야구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를 반 쪽발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대전한밭야구장=최진석 기자
고마운 재일동포 야구 선수들. 한화 이글스 김성근 감독은 1959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 땅을 밟은 바 있다. 영구 귀국한 뒤 50년이 넘는 야구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를 '반 쪽발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대전한밭야구장=최진석 기자

최근 야구계 원로인 김영덕 전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 1982년 OB 베어스를 국내 프로 야구 원년 챔피언으로 이끈 김 전 감독은 팔순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다. 2, 3년 전 건강이 조금 좋지 않았지만 지난 1년여 동안 매일 50분 정도 걷기를 하면서 많이 회복했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일구회 주최 행사 등에 참석해 야구인들은 물론 야구 팬들에게도 근황을 알렸다.

“교토에 있는 부모님에게 1, 2년만 (한국에서 야구를) 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떠난 게 반세기가 훌쩍 지나 버렸다”는 노 감독의 얼굴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한 70년 야구 인생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했다.

김 전 감독이 경상남도 합천이 고향인 부모의 땅을 밟은 건 그의 나이 28살 때였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한국에서 보냈으니 이제 그는 ‘반 쪽발이’가 아니다. 김 전 감독의 말투에는 김성근 한화 이글스 감독에게서 느낄 수 있는 재일동포 특유의 억양보다는 경상도 사투리가 더 강하다. 한국에 오기 전에 그가 듣고 배운 우리말이 경상도 사투리였기 때문이다. 김 전 감독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땅 설고 물 설은 환경은 둘째 치고 서울 말씨를 알아듣지 못한 게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김 전 감독은 글쓴이와 만난 며칠 뒤 조촐한 팔순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는 성기영 김인식 한영관 신현석 유승안 신경식 김정수 이정훈 이상군 송진우 김경호 등 동료, 후배 야구인들이 참석해 노 감독의 건강을 기원했다고 한다. 바쁜 일정이 있었던 박철순은 아들을 대신 보냈다고.

분당에 살고 있는 김 전 감독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재일동포 선수들에 대한 기억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글쓴이를 멀리 외야에서 보고도 더그아웃까지 달려와 모자를 벗고 깎듯하게 인사를 하던 홍문종, 부산 시내 유흥가에서 글쓴이를 보자 황급히 골목으로 숨어 버린 김정행, 1960년과 1970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왔을 때 깜짝 놀랄 수준의 언더핸드 투구력을 보였으나 국내 프로 야구에서 위력적인 구위를 보이지 못해 글쓴이를 실망하게 했던 김기태, 워낙 느린 변화구를 던져 ‘공 위에 파리가 앉을 정도’라고 과장해서 기사를 쓴 적이 있는 김신부 등 많은 얼굴이 어제 본 듯 눈앞을 스쳐 간다.

글쓴이는 재일동포라는 말을 듣거나 보게 되면 왠지 가슴이 저리다. 직접 경험은 하지 못했지만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기 전인 1990년, 백두산 인근 얼다오바이허[이도백하]에서 본 남루한 차림의 재중동포들의 모습에서 느낀 감정과 비슷하다. 조상들이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주 일대로 이주했기에 자신들의 뜻과 상관없이 다른 나라 땅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울컥했다. 모두가 동포(同胞)인데.

또 하나, 잊지 못할 장면이 있다. 1983년 10월 21일 잠실구장. 이날 벌어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MBC 청룡을 8-1로 꺾고 시리즈 전적 4승1무로 V10의 첫발을 내디뎠다. 곧 이어 열린 시상식에서 장명부는 시즌 30승으로 다승 1위와 함께 투수 부문 베스트 10(골든 글러브의 전신)으로 뽑혀 포수 부문 베스트 10으로 선발된 김무종과 나란히 시상대에 섰다.

그때 기준으로 볼 때 현역 선수로는 적지 않은 나이인 33살과 29살이었던 두 선수는 시상대 위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조센진’, 한국에서는 ‘반 쪽발이’로 불리며 어정쩡한 경계인으로 살아야 하는 재일동포 두 선수는 그 자리에서 매우 복잡한 감정이 복받쳤을 것이다.

그때부터 24년 전인 1959년 8월, 까까머리 고교생이 제 4회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 학생은 오직 야구 하나만을 생각하며 이듬해 귀국해 교통부와 기업은행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한 뒤 1970년대에는 충암고와 신일고 감독을 맡아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1982년에는 김영덕 감독의 코칭 스태프 일원으로 OB 베어스 투수들을 다듬어 한국시리즈 우승에 한몫했다. 영구 귀국한 뒤 50년이 넘는 야구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는 한화 이글스 김성근 감독이다. 이제 그를 ‘반 쪽발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국내 야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재일동포 선수들의 국내 진출에는 대략 두 차례의 큰 흐름이 있다. 첫 번째는 1960년대 초로, 이때 선수로는 김영덕과 김성근 외에 신용균 배수찬 박정일 등이 있다. 신용균은 한국이 1963년 서울에서 열린 제 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누르고 대회 첫 우승을 차지하는 데 단단히 한몫했다. 한국은 더블 리그로 벌어진 이 대회에서 일본을 5-2, 3-0으로 눌렀다. 신용균은 두 경기에서 모두 승리투수가 됐다. 두 번째는 1980년대 초 프로 야구가 출범할 때이다. 장명부 김무종 홍문종 등 외에 주동식 김일융 최일언 등이 얇은 국내 선수층을 메우며 프로 야구가 조기에 정착하는 데 이바지했다. 고마운 재일동포 선수들이다.

더팩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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