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⑥] '헐크' 이만수와 '오리궁둥이' 김성한
입력: 2013.06.04 15:30 / 수정: 2013.06.04 16:06

이만수(왼쪽)와 김성한은 1980년대 프로야구 최고의 강타자로 평가 받았다. /출처=스포츠서울 DB
이만수(왼쪽)와 김성한은 1980년대 프로야구 최고의 강타자로 평가 받았다. /출처=스포츠서울 DB

[ 심재희 기자] 프로야구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올 시즌은 신생팀 NC 다이노스가 합류하며 9구단 체제에서 열띤 순위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이번 <더팩트> 라이벌 열전의 주인공들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 프로야구의 인기에 디딤돌을 놓은 인물들이다. 프로야구 초창기를 화려하게 빛냈던 이만수와 김성한이 초대손님이다. 야구팬들의 추억 속에 여전히 '강타자'로 자리잡고 있는 두 선수의 이야기를 돌아보자.

◆ '헐크' 이만수

이만수는 1958년 9월 19일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거처를 대구로 옮겨 야구를 시작한 이만수는 대구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두각을 나타냈다. 야구 꿈나무로서 투타에서 모두 수준급 실력을 뽐내면서 유망주로 각광을 받았던 그는 대구중학교 시절 투수로 활약하면서 팀을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이만수는 대구상업고등학교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포수 포지션을 맡게 됐으며 초고교급 강타자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1977년 제32회 청룡기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대회에서는 타격 4관왕에 등극하면서 대구상업고등학교를 7년 만에 정상에 올려놓았다. 당연히 MVP도 그의 몫이었다. 한양대학교 진학 후 국가대표가 된 이만수는 프로원년(1982년)에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프로 무대에 나선 이만수는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포수로서 삼성의 안방 살림을 잘 이끌었고, 타격에서는 괴력을 발휘하며 시원한 홈런포를 펑펑 쏘아 올렸다. 1982년 MBC 청룡과 개막전 1회초 1사 2루의 상황에서 2루타를 터뜨리면서 프로야구 1호 안타와 1호 타점의 주인공이 됐고, 5회에는 홈런을 작렬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홈런 타자로 남게 됐다. 이후 이만수는 '타격의 신'으로 군림했다. 홈런왕 3회(1983년, 1984년 1985년, 타격왕 1회(1984년), 타점왕 4회(1983년, 1984년, 1985년, 1987년), 장타율왕 2회(1984년, 1987년), 골든글러브 5회 수상(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등의 훈장을 달면서 한국야구의 얼굴로서 자리매김 했다. 1984년 이뤄낸 타격 트리플크라운(타율왕, 홈런왕, 타점왕 동시 등극)은 당시까지 '믿을 수 없는 대기록'으로 평가 받았다.

이만수는 삼성의 안방 마님으로서 투수들을 잘 리드했다. /출처=스포츠서울 DB
이만수는 삼성의 '안방 마님'으로서 투수들을 잘 리드했다. /출처=스포츠서울 DB

이만수는 소속팀 삼성과 함께 최고의 선수로 거듭났다. 하지만 너무나도 우승 운이 없었다. 삼성이 정규리그에서 높은 승률을 기록하고도 포스트시즌에서 미역국을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첫 세 시즌에서 두 번이나 한국시리즈 패배의 쓴 잔을 들었고, 1985년에 전·후기리그 통합우승으로 체면을 세웠다. 이후 1997년 은퇴까지 꾸준히 삼성의 중심으로 활약했지만, 결국 우승의 영광을 더 이상 누리지 못했다. 은퇴 이후 이만수는 미국으로 건너가 지도자 수업을 쌓았다. 2000년부터 미국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코치직을 맡았고, 2005년 화이트삭스의 우승에 일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6년 11월 SK 와이번스 수석 코치로 다시 국내 무대에 서게 됐고, 2011년 여름 SK의 감독대행이 된 뒤 그 해 10월 29일 정식 감독으로 승격됐다.

◆ '오리궁둥이' 김성한

김성한은 1958년 5월 18일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실 축구로 운동과 첫 인연을 맺었다. 청소년 국가대표 출신이었던 형 김재한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화상사고로 인해 축구를 그만두게 됐고, 군산중앙초등학교 4학년때 야구부에 입단하게 됐다. 김성한은 군산중학교 2학년때 학교를 그만두면서 선수 생활이 끝날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군산상고에 진학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제대로 야구의 길을 걷게 됐다. 동국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그는 전매특허인 '오리궁둥이 타법'으로 대학 최고의 강타자로 거듭났고, 1982년 해태 타이거즈의 일원이 됐다.

해태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은 팀의 중심축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프로 첫 해에 타율 3할5리, 13홈런을 마크하면서 거포로서 자리매김했고, 이듬해 타율 3할2푼7리의 고타율로 매서운 타격감을 자랑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인 그는 1980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호타준족으로 명성을 떨쳤다. 1995년 은퇴할 때까지 14시즌 동안 1338게임에 출전했고, 평균타율 2할8푼6리, 1389안타, 207홈런, 781타점, 143도루를 기록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 30홈런 고지를 돌파하면서 장타력을 발휘했고, 1991년 한일슈퍼게임에서도 3개의 홈런을 터뜨리면서 대한민국 야구의 자존심을 세우기도 했다.

김성한은 현역 시절 오리궁둥이 타법으로 장타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출처=스포츠서울 DB
김성한은 현역 시절 '오리궁둥이 타법'으로 장타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출처=스포츠서울 DB

김성한의 해태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이었다. 14년 동안 총 7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최강팀' 해태의 '최강타자'가 바로 김성한이었다. 해태가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났으니, 팀의 주축이었던 김성한에게도 개인상 복이 돌아갔다. 1985년과 1988년 MVP의 영광을 안았고, 홈런왕 3회(1985년, 1988년, 1989년), 장타율왕 3회(1985년, 1988년, 1989년), 타점왕 2회(1982년, 1988년), 최다안타왕 2회(1985년, 1988년), 득점왕 1회(1989년), 골든글러브 6회(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1년) 등의 훈장을 남겼다. 총 10번의 올스타에 선정됐던 그는 1995년 해태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 안방마님과 만능선수

두 선수는 1980년대 프로야구를 이끈 주역들이었다. 프로원년부터 출중한 실력을 꾸준히 발휘하면서 야구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타격에 관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최고 기량을 자랑하며 '최고타자'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스타일은 사뭇 달랐다. 이만수가 팀의 살림을 책임지는 안방마님으로서 자리매김했다면, 김성한은 그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만능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이만수는 최고의 안방마님이었다. 삼성의 포수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면서 포수로서 최고의 기량을 자랑했다. 파이팅 넘치는 모습으로 팀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명포수'이면서 그는 프로야구의 최고 '공격형 포수'이기도 했다. 투수를 잘 리드해주면서 탁월한 타격 감각까지 발휘했다.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 홈런왕에 오르면서 최고의 거포로 공인 받았고, 1984년에는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타격 트리플크라운의 대업을 달성했다. 포수 마스크를 쓰고 5년 연속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한 그는 상대 투수들에게는 '공포의 강타자'였다.

이만수(오른쪽)와 김성한은 1980년대 최고 강타자로서 멋진 라이벌 열전을 펼쳤다. 사진은 2012년 넥센 한일 프로야구 레전드 매치 2012에 함께 참가한 모습. /출처=스포츠서울 DB
이만수(오른쪽)와 김성한은 1980년대 최고 강타자로서 멋진 라이벌 열전을 펼쳤다. 사진은 2012년 '넥센 한일 프로야구 레전드 매치 2012'에 함께 참가한 모습. /출처=스포츠서울 DB

김성한은 만능선수로 통했다. 투타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내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최고타자가 되기 전에 최고의 타자 겸 투수였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4시즌 동안 투수로도 뛰었다. 프로원년이었던 1982년에는 10승 고지도 밟았다. 투수 통산 기록은 15승 10패 방어율 3.02 2세이브. 웬만한 선발투수 뺨 치는 성적이다. 투타의 고른 활약으로 그는 한 시즌 '10승-10홈런-타점왕 동시 등극'이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김성한은 한 시즌 20홈런-20도루, 한 시즌 30홈런, 개인 통산 1000안타 등을 달성하며 '기록의 사나이'로 불리기도 했다.

◆ 제2의 야구인생

이만수는 삼성에서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은퇴했다. 한국야구의 한 획을 그은 슈퍼스타였지만 은퇴를 앞두고 구단과 좋지 못한 관계에 놓였다. 코치 연수와 선수 생활 연장 등에서 견해 차이를 보였고, 결국 이만수는 은퇴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쓸쓸하게 현역의 길에서 물러났다. 아쉬운 은퇴로 마음이 상했지만 이만수는 곧바로 '제2의 야구인생'을 꽃 피우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날아가 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1998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싱글 A팀인 킨스턴 인디언스로 코치 연수를 떠나 눈물 젖은 빵을 먹었다. 언어 문제 등 여러 가지 숙제들을 조금씩 풀어나간 그는 뚝심을 발휘하면서 결국 메이저리그 코치로 우뚝 서며 우승의 감격까지 맛봤다. 그리고 2010년 다시 국내 야구팬들 곁으로 돌아와 SK의 지휘봉을 잡게 됐다.

김성한은 은퇴 이후 지도자로 변신했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친정팀 해태의 감독이 되었다. 2000년 김응룡 감독으로부터 지휘봉을 넘겨받고 팀을 이끌었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팀을 이끌며 3년 반 동안 해태를 2번이나 플레이오프로 진출시켰다. 하지만 아쉬운 폭행사건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소속 선수 폭행사건과 연루되면서 2004년 사령탑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후 김성한은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운영위원으로 제 몫을 다했고, 방송해설위원을 거쳐 현재 한화 이글스의 코치로서 후배들을 조련하고 있다.

이만수 감독(왼쪽)과 김성한 코치는 지도자로서 후배들을 이끌고 있다. /출처=스포츠서울 DB
이만수 감독(왼쪽)과 김성한 코치는 지도자로서 후배들을 이끌고 있다. /출처=스포츠서울 DB

현재 프로야구 무대를 누비는 선수들은 이만수와 김성한을 바라보면서 꿈을 키웠다. 이만수와 김성한은 초창기 프로야구를 이끈 선두 주자였고, 후배들은 이만수와 김성한을 우상이자 롤 모델로 삼았다. '헐크' 이만수와 '오리궁둥이' 김성한이 없었다면, 이종범도 이승엽도 나올 수 없었고 프로야구의 전성시대도 오지 못했을 것이다. 방망이를 놓고 지휘봉을 잡고 있는 이만수와 김성한이 '제2의 야구인생'도 멋지게 이어가길 바란다.

kkamano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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