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①] '무쇠팔' 최동원과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입력: 2013.05.05 08:30 / 수정: 2013.05.05 08:30

최동원(오른쪽)과 선동열은 1980년대 프로야구 최고의 슈퍼스타 라이벌로 통했다. / 출처=스포츠서울 DB
최동원(오른쪽)과 선동열은 1980년대 프로야구 최고의 '슈퍼스타 라이벌'로 통했다. / 출처=스포츠서울 DB


[ 심재희 기자] 1982년 출범 이후 올해로 대한민국 프로야구가 32년째를 맞이했다. 그 동안 수많은 스타들이 등장했고, 숱한 명승부들이 펼쳐지면서 야구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스포츠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프로야구'라는 든든한 뿌리를 갖춘 한국야구는 무럭무럭 성장해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따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스포츠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라이벌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되짚어보는 <더팩트>의 '라이벌 열전' 시리즈 첫 번째 초대 손님은 대한민국 프로야구 32년사에서 가장 뜨거운 경쟁을 펼쳤던 인물들이다. 1980년대 '프로야구 붐'을 불러 일으켰던 최동원과 선동열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모든 야구팬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최동원과 선동열의 라이벌 열전을 다시 떠올려보자.

# '한국시리즈의 사나이' 최동원

1958년 부산에서 출생한 최동원은 학창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경남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던 1975년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이라는 믿기 힘든 기록을 만들어냈다. 그 상대가 당시 고교 최강으로 군림하던 경북고등학교와 선린상업고등학교였으니 "한국야구에 천재투수가 나타났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당시 최동원은 일본 프로야구 무대의 구애의 손짓을 수없이 받았지만 반한 감정 등을 이유로 일본행을 접었다. 해외 진출을 뒤로한 채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최동원은 더욱 성장하면서 '대한민국의 에이스'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대륙간컵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등을 통해 세계적인 기량을 뽐내면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러 팀 가운데 최동원이 선택한 구단은 토론토 블루제이스였다. 최동원은 토론토와 입단 계약을 정식으로 맺으며 빅리거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또 한번의 운명의 장난이 그를 가로막았다. 병역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미국으로 날아갈 수가 없었다.

1983년 고향 팀 롯데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고 프로무대에 뛰어든 최동원은 초반 고전했다. 데뷔 시즌 9승 16패의 성적에 머물렀다. 200이닝 이상을 소화했고 방어율도 2.89로 낮았지만 승운이 따르지 않았다. 프로 첫 해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에 그친 그는 이듬해 어금니를 꽉 깨물고 포수 미트를 향해 불같은 강속구를 뿌렸다. 그리고 최고의 투수 반열에 곧바로 올라섰다. 27승 13패 방어율 2.40의 좋은 성적으로 소속팀 롯데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최동원은 전성기를 맞았다. 1985년에 다시 20승(9패) 고지를 밟았고, 1986년(19승 14패)과 1987년(14승 12패)에도 두 자릿수 승수를 올렸다. 1988년부터 노쇠화 기미를 보인 그는 1989년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해 1990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프로 통산 8시즌 동안 248경기에 출전해 103승 74패 방어율 2.46 1019탈삼진의 기록을 남겼다.

최동원은 롯데의 에이스로서 부산 팬들의 사랑을 듬뿍받았다. 특히 그는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을 기록하면서 롯데의 첫 우승의 주역이 됐다. /출처=스포츠서울 DB
최동원은 롯데의 에이스로서 부산 팬들의 사랑을 듬뿍받았다. 특히 그는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을 기록하면서 롯데의 첫 우승의 주역이 됐다. /출처=스포츠서울 DB

최동원 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순간이 바로 1984년 한국시리즈다. 최동원은 당시 모든 승리를 자신이 책임지면서 소속팀 롯데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오죽 했으면 '최동원 원맨쇼'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7전 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롯데는 최강 전력의 삼성 라이온즈를 4승 3패로 따돌리고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롯데가 거둔 4승의 승리투수에 모두 '최동원'이라는 이름이 올라갔다. 1차전에서 9이닝 7피안타 완봉승으로 롯데의 4-0 승리를 이끈 최동원은 3차전에 다시 등판해 9이닝 6피안타 2실점 완투승으로 한국시리즈 2승째를 올렸다. 5차전에서는 8이닝 6안타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롯데가 2-3으로 패하면서 패전투수가 됐다. 여기까지만 해도 정말 믿기 힘든 투구를 펼친 최동원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에 아니었다. 롯데가 2승 3패로 패배의 위기에 몰리자 강병철 감독은 6차전에서 '믿을맨' 최동원을 구원투수로 투입했고, 최동원은 역투를 펼치면서 롯데의 승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대망의 7차전. 최동원은 다시 선발로 나서 완투하며 롯데의 버팀목이 되어줬다. 한국시리즈 7경기 40이닝 4승. '고무팔', '무쇠팔'이라는 별명이 최동원의 이름 앞에 새롭게 붙었다.

#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선동열은 1963년 광주에서 처음 세상의 빛을 봤다. 초등학교 야구부 포수였던 형(선형주)과 함께 심심풀이로 야구를 즐긴 것이 인연이 되어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무등중학교와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그는 이미 성인 못지않은 기량을 갖췄다. 묵직한 직구와 완벽한 제구력의 변화구까지 창작한 그는 1981년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해 MVP에 올랐고, 1982년에는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한국의 우승을 이끌면서 대회 MVP에 등극했다. 당시 고려대학교 재학 중이었던 그에게 미국과 일본의 명문 팀들이 군침을 흘렸다. 선동열 본인도 더 큰 무대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고,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으로 병역 문제도 해결한 상황이라 해외 진출이 유력해 보였다. 하지만 정보 부족 등의 이유로 해외 진출은 물거품이 됐고, 그는 한국 프로야구 무대에 뛰어들게 됐다.

1985년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선동열은 믿기 힘든 완벽한 투구로 '국보급 투수'라는 칭호를 얻었다. 입단 첫 해 이중계약 징계로 전반기를 뛸 수 없었지만 7승 4패 방어율 1.70의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입단 2년차에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의 상대팀 폭격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1986년 24승 6패 방어율 0.99 214탈삼진의 기록을 남긴 선동열은 1987년부터 1991년까지 모두 두 자릿수 승수를 올렸고 방어율도 1점대 초반을 넘기지 않았다. 이닝당 1개 이상의 탈삼진을 뽑아내면서 상대 타자들을 무수히 돌려세웠다. 1992년부터는 구원투수로 변신해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면서 해태의 수호신으로 거듭났다. 선동열은 1995년까지 11시즌 동안 367경기 146승 40패 132세이브 방어율 1.20 1698탈삼진의 기록을 남기고 일본 무대로 날아갔다.

선동열은 해태에 입단해 그야말로 언터처블의 모습을 보였다. 선발과 마무리에서 모두 상대를 압도하는 투구를 펼치며 해태의 수호신으로 거듭났다. /출처=기아 타이거즈 구단
선동열은 해태에 입단해 그야말로 '언터처블'의 모습을 보였다. 선발과 마무리에서 모두 상대를 압도하는 투구를 펼치며 해태의 수호신으로 거듭났다. /출처=기아 타이거즈 구단

선동열은 1996년 일본의 명문 팀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했다. 하지만 일본 무대는 만만치 않았다. 입단 첫 해 38경기에 등판해 5승 1패 3세이브 방어율 5.50을 기록했다. 마무리 투수로서 세이브가 너무 적었고, 방어율도 매우 높았다. 일본야구의 매서운 맛에 혼쭐난 선동열은 절치부심 하며 두 번째 시즌 제 모습을 되찾았다. 43경기에 등판해 1승 1패 38세이브 방어율 1.28을 기록하면서 '나고야의 태양'으로 떠올랐다. 1998년과 1999년에도 선동열은 주니치의 확실한 클로저로 자리매김 하면서 리그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공인 받았다. 일본에서 4시즌 동안 162경기 10승 4패 98세이브 방어율 2.70이라는 좋은 기록을 남긴 그는 1999년 은퇴와 메이저리그 도전의 기로에 섰다. 3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메이저리그 여러 팀들이 적극적으로 영입의사를 밝힐 정도로 선동열의 공에는 힘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최고의 위치에서 깨끗하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 폭포수 커브 vs 면도날 슬라이더

최동원과 선동열이 최고의 투수로 군림할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역시 위력적인 직구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선수 모두 어린 시절부터 강속구를 장착했고, 국내에서는 당대 최고의 직구 위력을 자랑했다. 일단 속도부터 남달랐다. 두 선수 모두 시속 150km를 넘는 직구를 뿌렸다. 둘이 활약하던 때가 타격 기술과 타자들의 힘이 지금보다 많이 떨어졌던 시기임을 고려하면, 시속 150km의 직구는 정말 치기 힘든 공이었다. 최근 선수들의 체격과 투구 분석 등이 더 좋아지면서 시속 160km를 넘는 강속구가 등장하기도 한다. 만약 최동원과 선동열이 현재의 시스템과 환경 속에 있었다면 충분히 시속 160km까지 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두 선수는 '무브먼트'라고 하는 볼 끝도 매우 지저분하고 묵직했으며, 코너워크도 절묘했다. 돌덩이 같은 시속 150km의 직구가 스트라이크 존 구석구석을 절묘하게 파고들면 타자들은 흠칫 놀라면서 방망이를 휘둘러보지도 못하곤 했다. '명품직구'는 최동원과 선동열의 공통분모였다.

야구에서 투수에게 직구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변화구다. 직구만 계속 던지면 언젠가는 타자에게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빠르고 위력적인 직구라도 타자들이 계속 보고 눈에 익으면 타이밍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직구를 강하게 던지면서도 변화구로 타이밍을 죽이면서 강약조절을 해야 전체적으로 유연한 투구를 이어갈 수 있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위력적인 직구를 갖췄다는 공통점을 보였지만, 직구와 섞어 던지는 주요 변화구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최동원은 커브, 선동열은 슬라이더를 대표 변화구로 삼았다.

먼저, 최동원의 커브는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으면서 헛스윙을 곧잘 유도했다. 위력적인 직구를 계속 뿌리다가 갑자기 커브가 들어오면 타자들은 전혀 배팅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고 몸의 중심이 무너지면서 방망이를 헛돌렸다. 직구 최고구속보다 많게는 시속 20km까지 느린 최동원의 커브는 현재까지도 최고로 손꼽힌다. 꺾이는 각이 워낙 커서 '폭포수 커브'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최동원의 폭포수 커브에 속아 넘어간 타자들은 헬멧이 벗겨지고 방망이를 손에서 놓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공이 떨어질 때 타자들이 '속았다'고 느끼지만, 그 순간은 이미 늦은 때다.

선동열은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삼았다. 직구와 똑같이 오다가 옆으로 슬그머니 흘러가는 슬라이더로 잇따라 타자들을 돌려세웠다. 사실 선동열은 투수 치고는 손가락이 짧았다. 신체구조상(?) 포크볼 등의 고급 변화구를 던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자신의 짧은 손가락으로 '선동열표 슬라이더'를 완성했다.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이른바 '면도날 슬라이더'라고 불렀다. 면도날처럼 깎이는 각이 예리하고 빨랐기 때문이다. 시속 130km 후반의 구속을 보였으니, 타자 입장에서는 직구와 구분하기가 사실상 힘들었다. "선동열표 슬라이더는 알고도 못 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한 외국인 투수가 선동열의 선수 시절 슬라이더 동영상을 보고 "직접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지금 봐도 그의 슬라이더는 최강의 무기였다.

# 세기의 맞대결

최동원이 예상보다 빨리 현역에서 은퇴했고, 선동열이 프로무대에 늦게 진입하면서 두 투수의 맞대결은 그리 많이 이뤄지지 않았다. 1986년과 1987년 두 시즌 정도가 둘의 진정한 맞대결이 벌어진 때로 여겨진다. 최동원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시점이었고, 선동열이 프로에 완전히 적응하면서 최고로 떠오르는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이후 최동원이 삼성으로 이적하고 선동열이 마무리로 보직을 변경했기에, 두 선수가 롯데와 해태의 선발에이스로 우뚝 서 있던 1980년대 중반이 바로 '세기의 맞대결'이 펼쳐진 순간이었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프로무대에서 총 4번 맞붙었다. '황금팔 맞대결'의 결과는 2승 1무 1패로 선동열의 근소한 우위였다. 하지만 세 번의 선발등판 맞대결에서는 1승 1무 1패로 호각세를 이뤘다. 공교롭게도 세 차례 선발 맞대결이 모두 롯데의 홈인 사직구장에서 펼쳐졌다. 기선 제압을 한 쪽은 선동열이었다. 1986년 4월 19일 롯데와 해태의 맞대결에서 둘 다 완투를 한 가운데 무실점을 기록한 선동열이 홈런을 맞고 1실점을 내준 최동원을 꺾었다. 그 해 8월 19일 두 번째 대결에서는 최동원이 멍군을 불렀다. 역시 둘 모두 완투했다. 무실점 완봉으로 경기를 마무리한 최동원이 2실점을 내준 선동열을 제압했다.

선발대결 1승 1패. 최동원과 선동열은 운명의 승부를 기다리고 있었고, 1987년 5월 16일 또 한 번의 선발 맞대결을 펼치게 됐다. 그 경기가 바로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발투수 명승부로 기억되고 있는 '세기의 대결'이다. 롯데와 해태를 넘어 대한민국 최고의 에이스 자리를 다투던 두 선수는 자존심을 건 승부를 이어갔다. 결과는 무승부. 15회 연장까지 2-2로 경기가 이어지면서 결국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둘 모두 15회 4시 56분의 치열한 혈투를 끝까지 함께 했다는 것이다. 선동열이 232개의 공을 뿌렸고, 최동원도 209개의 공을 던졌다. 그렇게 최동원과 선동열의 세기의 명승부는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영상] 최동원-선동열 '15회 맞대결' 다시 보기!(http://www.youtube.com/watch?v=iqLe1vsQZ1U&list=PL6FBF82E84E77D96F)

# 제2의 '최동원-선동열'을 바라며!

2011년 9월 14일. 한국야구의 큰 별이 졌다. 최동원이 별세했다. 모든 야구인들과 팬들이 눈물을 흘렸고,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선동열도 먼저 떠난 선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해 12월 '퍼펙트게임'이라는 야구 영화가 개봉돼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최동원과 선동열의 선수 시절 라이벌 열전을 그려 감동을 전했다.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처럼 아직도 최동원과 선동열의 라이벌 열전의 뜨거움은 팬들의 가슴 속에 잔잔히 남아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최동원-선동열의 라이벌 구도가 나온 이후 한 동안 그에 버금가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좋은 투수들은 많았다. 하지만 두 선수가 보여줬던 한 차원 높은 기량을 확실히 갖춘 선수는 없었고, 치열한 라이벌 열전도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최동원과 선동열을 한 시대에 같이 볼 수 있었던 1980년대가 가장 행복했다"는 한 야구팬의 말이 그래서 아직도 귓가를 떨리게 한다. 제2의 최동원과 선동열, 그리고 '세기의 라이벌전'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kkamano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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