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일의 코리언 레전드]<18> '4할타자' 백인천 "日 구심, 멱살 잡고 내동댕이쳐…" ②편
입력: 2012.02.01 10:55 / 수정: 2012.02.01 10:55

▶[동영상] '전설의 4할 타자' 백인천, 이영미 타격상 트로피 공개

찻잔을 들고 창밖을 응시하던 백인천(69)은 어려웠던 그때 그 시절, 일본 야구 정복기를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시대 분위기상 일본 진출을 놓고 국내의 찬반양론이 엇갈리는 등 19살이라는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고 대한해협을 건넜던지라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과 의지가 공존했다.

▲ 전설의 4할 타자 백인천 전 야구 감독이 1982년 한국 프로야구에서 4할을 쳤을 때 가장 많이 사용했던 방망이를 공개하고 있다 / 노시훈 기자.
▲ '전설의 4할 타자' 백인천 전 야구 감독이 1982년 한국 프로야구에서 4할을
쳤을 때 가장 많이 사용했던 방망이를 공개하고 있다 / 노시훈 기자.

-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합류했을 때 어떠셨나요?

선수들이 참 많더라고. 우리나라는 소수의 자원들로 꾸려 가는데, 세상에나 내가 갔을 때 번호가 남은 게 없어서 68번을 주더라고요.(웃음) 코치도 7~8명이고. 내 포수 자리에만 10명의 선수가 있어. 완전히 쇼크였죠. 눈 앞이 캄캄하고. 감독이 내게 한번 뛰어보라고 했어요. 내가 발이 빨랐거든. 경쟁을 해보니 7명은 이길 수 있는 수준이었고 3명과 경쟁 체제가 됐어요.
- 입단 1년 6개월 만인 63년 6월 26일. 1군 데뷔전을 치렀지요?

첫 목표가 제발 한 경기만이라도 1군에서 뛰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거였어. 그런데 그 전날 평소처럼 2군 경기를 뛰는데 역전 끝내기 홈런을 쳤어요. 2군 감독이 내일 1군 경기할 때 도우미로 따라가라고. 경기 출전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머리 보호대, 방망이 다 놓고 갔으니. 난카이 호크스(현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이었는데 1군 포수 2명이 다쳤어요.(웃음) 감독께서 7회 초 나를 교체 투입했는데 꿈 같았죠. 첫 타석에서 플라이 아웃을 당했는데 관중 함성 소리에 잘 친줄 알고 무작정 뛰었던 기억이 나요. 관중들은 웃고.(웃음)
- 다음 날 첫 안타를 쳤어요. 일본 언론들은 '도에이 포수의 광명'이라고 보도했다던데.

맞아요. 첫 선발로 나서 2회 초 3루에서 홈 스틸을 하는 선수를 블로킹해 실점을 막았고, 6회 말에 유격수 키를 넘기는 안타로 3타수 1안타, 스틸 2개를 했죠. 그 이후 승승장구 할 수 있었어요.

- 70년 5월 23일 긴테스 버팔로스전에서 구심과 멱살을 잡은 사건이 있었는데요?

스유사키 구심이었는데 그 친구가 복싱 선수 출신이었어요. 나랑 친했거든요? 단 우리 팀하고 사이가 안 좋았어.(웃음) 당시 1회 말 내가 타석에 섰는데 아웃코너로 낮게 들어온 볼을 '스트라이크 아웃' 선언한 거야. 상대 포수는 킥킥 웃더라고. 화가 났지. '왜 스트라이크냐'하니, '불만 있느냐'며 퇴장 시켰어요. 화가 나서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 쳐버렸지.(웃음) 일본 언론들은 한국인이 자국민을 때렸다고 보도하고. 다행히 스유사키가 4일 만에 고소를 취하했어요.

▲ 백 전 감독이 일본 시절 깜짝 트레이드된 후 친정팀을 상대로 홈런을 쳤던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 백 전 감독이 일본 시절 깜짝 트레이드된 후 친정팀을 상대로 홈런을 쳤던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시나브로 성장을 거듭한 백인천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꿈 같은 수위타자 자리에 오른 것은 75년이었다. 74년 1월 28일 다이헤이요 라이온스의 외야수 히가시타와 트레이드돼 유니폼을 바꿔 입은 그는 75년 4월 5일 홈구장에서 열린 친정팀 니혼햄과 경기에서 7회 말 시즌 첫 홈런을 터뜨렸고, 연장 11회 말 내야안타를 쳐 4-3 승리에 주역이 된다.

- 깜짝 이적 뒤 친정팀을 상대로 통쾌하게 홈런을 쳤지요?

도에이가 니혼햄으로 개명되면서 매각 형태로 이뤄진 거죠. 당시 새 감독이 자국 선수를 선호하면서 나를 빼려고 하더라고. 갈 땐 가더라도 '내가 고쳐야할 점은 무엇이었느냐'고 반문했어요. 감독은 얘기를 안 하더라고. 그래서 프로 선수는 어떤 것이 필요하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실패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하라'고. 그래, 두고보자하고 떠났죠. 그리고 개막전에서 니혼햄을 상대로 홈런을 쳐 통쾌했죠.(웃음)
- 새 팀으로 가서 일본 진출 13년 만에 수위타자에 오른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해요.

늦게 꽃이 핀 거지만, 하나하나 꾸준하게 해왔기에 롱런할 수 있었죠. 10년이 지나도 신인이라고 생각하며 운동했어요. 75년은 퍼시픽리그 타격 3위(0.315)에 올랐던 72년보다 감이 좋았죠. 좋은 컨디션이 막판까지 유지돼 페넌트레이스를 마치고 0.319로 수위타자에 올랐어요. 장훈 선배에 이어 두 번째로 성공한 거죠.

▲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원년에 국내로 복귀한 백인천.
▲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원년에 국내로 복귀한 백인천.

- 20년의 일본 생활을 접고 82년 한국 프로야구 원년에 복귀 하셨는데요?

일본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다시 한국에 오려니까 엄청 고민되더군요. 주변에서는 일본에서 자리 잡고 잘 하고 있는데 왜 굳이 가려느냐. 거기서 은퇴하지. 그런데 사명감이 있었어요. 한국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자. 실력 보다는 죽기 살기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결심했죠.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했어요. 그때 42살이었는데 연습량을 후배들이 따라오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
- 4할1푼2리. 불멸의 기록인데, 시대 상 앞으로도 깨지기 힘들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앞서 말했듯이 실력 외에 사명감을 갖고 있어야 해요. 내가 19살 때 일본에 가면서 성공하지 못하면 죽고 안 오겠다는 내용의 일기를 쓴 적이 있어요. 어려서 장난으로 쓴 게 아니에요. 그만큼 100% 집중했죠. 야구는 아웃되면 죽은 거죠. 현실은 살아있어도, 경기에선 죽은 거예요. 타자가 자주 죽으면 프로로서 가치가 없는 것. 그것을 늘 피부에 느끼려고 노력했어요. 요즘 시대는 할 것들이 워낙 많아서 후배 선수들이 야구에 100% 진심을 다하지 않는 것 같아. 3할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됐으니 안타깝죠.
- 4할을 달성한 시즌에 마지막 경기에서 코치가 출장을 만류했었다고요?

쉬라고 하더라고. 마지막 경기 전까지 타율이 4할8리 였는데 혹시 안타를 못 치면 3할대로 떨어지잖아요?(웃음)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소리치고 떡 하니 나가 4타수 3안타를 때렸지.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내용을 입력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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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역 생활 뒤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한 LG 트윈스 창단 감독으로 우승을 하셨어요.

알다시피 중간에 아내와 이혼, 간통죄 고소 등으로 어두운 시간을 보냈죠. 정리가 되면서 야구에 내가 굶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인생의 마지막 반전이 필요하다.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 다행히 과거 한솥밥을 먹었던 은퇴한 야구 후배들을 몇몇 모아 코치진을 꾸려 간절하게 도전한 끝에 이룰 수 있었어요. (당시 LG 특전사라는 별칭도 있었는데) 모든 선수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눈물도 흘리면서 힘든 훈련을 이겨낼 때 성공을 예감했죠.

- 현재 LG 팬들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많아요.

내가 그 부분을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워요.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LG는 과거 MBC서부터 흘러온 전통이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그 색깔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죠. 프로라면 지식과 노력, 경험이 하나가 돼야 한다고 말했죠? 선수는 자기 자신을 속이면 안돼요. 코치가 하루에 방망이 100번씩 휘두르라고 했는데, 안 했으면서 했다고 쳐요. 그렇다고 문제는 없어요. 단, 그 효과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죠. 1% 가능성도 믿고 도전해야죠.

- 이후 건강상의 어려움을 딛고 다시 야구계로 복귀하셨어요. 그 동안 4개 팀을 맡아보며 느낀 점은요?

백인천만의 근성 있는 야구를 보여주려고 했어요. 난 일본 갔을 때 바닥서부터 시작을 했잖아요? 난 바닥을 좋아하나 봐요.(웃음) 어려운 상황에서도 선수들의 능력을 밑바닥부터 끌어올리고 싶었죠. 남들은 '그 정도 했으면 남은 야구 인생 편하게 즐기라'고 하지만 나와 맞지 않았어요. 힘들게 야구 생활은 했지만, 바닥부터 자란 내공을 전해주고 싶었죠.
- 후배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앞서 4할 쳤을 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실력도 중요하지만 '욕심'이 없어야 해요. 마음을 비울 줄 아는 사람은 성공합니다. 난 프로 생활을 하면서 비우는 법을 배웠어요. 그래서 건강도 찾을 수 있었던 것이고. 야구를 해서 얻은 것, 잃은 것도 있었지만 난 비울 줄 아는 지혜를 얻었다는 게 가장 행복해요. 후배들에게도 꼭 비우라고 말하고 싶어요.

- 백인천 야구인생의 마지막 꿈이 있다면요?

요즘 순수한 마음으로 아마추어들을 대상으로 야구교실을 하고 있어요. 일부 고등학생들은 본인들의 야구 동호회 명예 감독을 맡아달라고 하더라고. 나도 좋아서 흔쾌히 하겠다고.(웃음) 이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유망주들을 길러내는 것 같아요. 사회인 야구에 재미요소를 더하는 것이고요. 야구가 하나의 꿈과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전도사가 돼야죠. 이 꿈이 더 커지면 야구 재단도 설립하고 싶네요.

▲ 건강을 찾고 생활의 활력을 찾은 백인천. 한국 야구의 슈퍼 아이콘으로 살아온 그의 질주는 계속된다.
▲ 건강을 찾고 생활의 활력을 찾은 백인천. 한국 야구의 슈퍼 아이콘으로
살아온 그의 질주는 계속된다.

<글 = 김용일 기자, 사진 = 노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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