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서울 올림픽공원=오승혁 기자] "선수들이 극심한 불안감에 떨고 있습니다. 원활한 경기 준비조차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물리적 충돌도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필수 서류와 기기만이라도 가지고 나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20분이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 20분을 열어주지 않아 벌써 60억 원에 달하는 행정적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공권력이 투입되더라도 물리적 충돌을 유도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9개 단체가 입주해 있는 건물에서 필수 물품을 가지고 나올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시간만 확보해 달라는 것입니다." (유승민 대한체육회 회장)
"대한체육회 직원 1명을 집회 참가 시민 100여 명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공포감을 이겨내고, 경찰이 우리더러 직접 물리적 충돌을 감수하며 필요 물품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인지 상당한 의문이 듭니다." (대한당구연맹 사무처장)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촉발된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 집회가 두 번의 주말을 지나 11일 차를 맞이했다. 15일 늦은 오후, 올림픽공원은 저마다 다른 세 가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못 근처와 숲길을 거닐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시민들, "부정선거! 재선거!"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하게 집회에 참여하는 이들, 그리고 마비된 행정 상황에 울분을 터뜨리는 대한체육회 관계자들이 한 공간에서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이날 '오승혁의 현장'이 일곱 차례에 걸쳐 둘러본 올림픽공원은 미소와 외침, 떨리는 목소리가 뒤섞인 혼돈의 현장이었다. 서울지하철 5·9호선 올림픽공원역 인근 핸드볼경기장 앞 집회 현장에서는 "한미 공조! 국제수사!"라는 새로운 구호가 더해지며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게 울려 퍼졌다.

올림픽공원역 출구 앞에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판매하는 상인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한쪽에는 "부정선거 의혹에 동의하냐"고 묻는 스티커 투표판과 관련 영화를 상영하는 플랫폼 홍보 플래카드가 크게 걸려 있었다.
월요일 낮을 맞아 다소 줄어든 1000여 명의 집회 참가자들은 무더위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들은 지원 받은 컵라면과 음료 등으로 허기를 달래며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반면 이곳에서 도보로 15분가량 떨어진 서울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방면 올림픽공원은 산책과 휴식을 즐기는 이들로 가득해 전혀 다른 세상인 듯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같은 시각 몽촌호가 내려다보이는 올림픽파크텔 회의실에서는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핸드볼경기장에 입주한 대한산악연맹, 대한우슈협회, 대한당구연맹, 대한수중핀수영협회, 대한펜싱협회, 대한민국댄스스포츠연맹, 대한핸드볼협회, 대한세팍타크로협회 등 8개 단체 사무처장과 유승민 대한체육회 회장은 집회로 인해 체육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강하게 토로했다.
유승민 회장은 "모든 국민은 참정권을 포함해 집회의 권리와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기에, 그간 이 권리를 최대한 존중하고 물리적 충돌을 피하려 노력했다"면서도 "하지만 실시간으로 누적되는 행정 마비와 피해가 너무 크다. 이미 한계에 다다랐으며, 이제는 경찰력의 개입을 통한 해결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6·3 지방선거 다음 날인 지난 4일, 핸드볼경기장 입주 경기 단체 직원들이 건물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 생전 처음 겪는 모욕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특히 핸드볼 청소년 선수들이 집회 참가자들에게 가방 수색을 당하고 폭언과 모욕을 겪은 사건에 대해서 모든 가맹 단체가 힘을 모아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체육회에 따르면 핸드볼경기장 내 체육 행정 공간 출입 제한이 장기화하면서 국가대표 지원 및 국제대회 준비 등 핵심 행정 업무가 사실상 마비된 상태다. 아시아펜싱선수권대회 참가를 앞둔 펜싱 국가대표 선수단과 인천 세계핀수영선수권대회 개최를 준비 중인 대한수중핀수영협회는 당장 필수 훈련 장비와 자료 반출조차 제때 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다.
유 회장은 "장비는 선수들에게 매우 민감한 부분이며, 정신적인 안정이 곧 경기력과 직결되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져 너무나 안타깝다"며 "단 20분이면 필수 장비와 서류를 챙겨 나올 수 있음에도 집회 참가자들이 이를 가로막아 피해가 매일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기자회견에 참석한 사무처장들은 극심한 피로감과 두려움을 호소했다. 이들은 사무실 진입을 위해 핸드볼경기장 게이트를 지키는 집회 참가자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노출되었고, 이후 무차별적인 문자 및 전화 테러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대화와 진입 자체가 불가능한 이유다.
호수를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시민들의 평온함과, 선수들의 경기 용품과 필수 서류 문제만이라도 해결할 수 있게 도와달라며 호소하는 체육인들의 울분. 부정선거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시민들의 시위 등 세 갈래로 갈라진 목소리가 이날 올림픽공원의 하늘을 어지럽게 수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