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서울 을지로=오승혁 기자] "애초에 현수막 가격이 지나치게 저렴한 점이 문제죠. 현수막 제작 위주로 하던 업체들은 다 못 버티고 을지로 떠났어요. 우리가 흔히 횡단보도에서 보는 8m 길이 대형 현수막이 돈 10만원밖에 안해요." (을지로 인쇄골목 관계자)
"현수막 원단 공급 업체가 단가를 보내주면 거기에 맞춰서 가격이 결정되는데, 아직 단가 공문을 못 받았어요. 정확히 얼마나 오를지는 모르겠는데, 한 30% 오를 것 같아요." (을지로 인쇄골목 관계자)
30일 '오승혁의 '현장''은 서울 중구에 위치한 을지로 인쇄골목을 찾았다. 이곳의 역사는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여파로 촉발된 글로벌 나프타(Naphtha) 공급망 불안정의 여파가 인쇄소로도 번졌다는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최근 쓰레기봉투와 비닐봉투 구매 대란으로 이어진 나프타 사태의 불똥이 이번에는 도심 곳곳을 뒤덮은 '현수막'으로 튈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활자 업무를 당담한 주자소가 서울 중구 퇴계로 남산스퀘어빌딩 자리에서 문을 열면서부터 조성됐다. 1970년대 서울 중구 장교동 재개발로 이사온 인쇄소들이 충무로역과 을지로3가역 등에 걸쳐 인쇄 골목을 형성하면서 한 동네 안에 5000여 곳에 달하는 영세 인쇄 업체들이 모이게 됐다.
이날 아침 찾은 을지로 인쇄골목은 새벽부터 이어진 작업의 열기로 가득했다. 이른바 '힙지로'라 불리며 트렌디한 카페와 맛집, 술집이 상권을 장악해 예전보다 인쇄소의 수는 줄었지만, 좁은 골목 사이를 누비는 지게차와 삼륜 오토바이, 산더미처럼 쌓인 나무 팔레트는 여전히 이곳이 활발한 산업 현장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특히 우리가 횡단보도나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하는 대형 현수막(천막)들은 간판에 해당 품목을 명시한 전문 업체들을 중심으로 바쁘게 제작되고 있었다. 최근 배너나 포스터, 다이어리 등을 취급하는 업체들은 성업 중인 반면 대형 현수막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골목에서 만난 여러 인쇄업체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길거리에 거는 대형 현수막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큰 돈이 되지 않는다"고 현실의 고통을 토로했다. 단가 자체가 워낙 낮게 형성되어 있다 보니, 마진을 남기기 어려워 아예 서울 외곽으로 공장을 이전한 업체들도 상당수라는 설명이다.
가장 큰 관심사인 '나프타 사태로 인한 가격 인상'에 대해서는 업체마다 체감하는 온도가 달랐다. 한 업체 관계자는 "원단 공급 업체로부터 아직 공식적인 가격 인상 공지를 받지 못했다"며 "사태의 여파가 이곳까지 정확히 미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반면 이미 원가 상승의 직격탄을 맞은 곳도 적지 않았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실제로 가격이 꽤 올랐다. 6~7만원이던 5m 현수막은 한 9만원 갈 것 같고, 기존에 10만원 선이던 8m 현수막이 13만원 꼴로 오른 상황이니, 주문하는 입장에서는 30% 가까이 뛴 셈이라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수막의 절대적인 가격 자체가 여전히 저렴하다는 것이 '현수막 공해' 문제의 핵심으로 지적된다. 2022년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옥외광고물법 개정으로 인해 정치적 목적의 현수막을 자유롭게 걸 수 있게 되면서 시민들은 횡단보도, 사거리 등 발걸음을 멈추거나 주정차를 해야 하는 거의 모든 공간에서 현수막을 마주하게 됐다.
현재 서울 도심의 사거리는 그야말로 현수막의 바다다. 비단 정치적인 내용에 그치지 않는다. 마라톤 대회 교통통제 안내부터 대형 마트의 가정의 달 판촉, 심지어 이순신 장군 탄신일 기념 현수막까지 내용도 각양각색이다. 무엇보다 시민들의 피로도를 높이는 것은 서로를 향한 비방과 헐뜯기로 얼룩진 '정치 현수막'들이다.
결론적으로 나프타 사태로 인한 가격 인상이 '현수막 공해'를 막기에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인다. 10만원에서 13만원으로 오른 가격이 군소 정당이나 무소속 후보들에게는 부담일 수 있으나, 홍보 효과를 노리는 정치권이나 대형 단체들의 발목을 잡을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쇄소 관계자 역시 "가격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현수막 주문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올해 치러질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과 후보자들의 '현수막 전쟁'은 더욱 첨예해질 가능성이 크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마주해야 하는 마주해야 하는 불편한 문구들과 시각적 피로감은 나프타 공급망 위기 속에서도 쉽게 걷히지 않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