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서울 중구=오승혁 기자] "여기에 진짜 마(魔)가 꼈나."
27일 오전, 전날 저녁 대형 화재가 발생한 서울 중구 북창동 음식거리 초입. 폴리스라인 너머로 시커멓게 탄 건물을 바라보던 한 시민이 탄식 섞인 혼잣말을 내뱉자, 곁에 있던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1년 반 전, 9명의 목숨을 앗아간 '시청역 역주행 참사'의 비극이 서린 바로 그곳이다.
전날 오후 6시 20분경 시작된 불은 3시간 30분 만에 완진됐지만, 상흔은 처참했다. 1935년에 지어진 이 91년 된 노후 목조 건물은 1층 식당부터 3층 옥탑까지 모두 화마에 삼켜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손님들로 북적였을 김치찌개집 앞에는 깨진 유리 파편과 각종 집기, 타버린 나무 조각들이 나뒹굴었다. 현장을 지나던 직장인은 "어제 퇴근길에 하늘이 시커멓길래 건물 뒤편 공사장에서 불이 난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 자주 가던 식당이라 너무 놀랐다"며 아연실색했다.
또 다른 시민은 "1층 식당은 참사 이후 원래 있던 가게가 나가고 새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곳인데…"라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이번 화재가 시민들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 건 장소의 상징성 때문이다. 화재 현장은 2024년 7월 1일, 68세 남성 차 모 씨가 운전한 제네시스 G80 차량이 인도로 돌진해 9명이 숨지고 7명이 다친 '시청역 역주행 사고'가 발생한 지점과 맞닿아 있다.
당시 수상과 승진을 축하하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다 변을 당한 이들을 향한 애도의 꽃다발이 놓였던 자리에는, 이제 화마가 남긴 검은 잔해들만 높이 쌓여 있었다. 비극의 장소에서 또 다른 비극이 되풀이된 셈이다.
이날 오전 중구청 관계자들이 거리 출입을 통제하고 그을음을 씻어내는 물청소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근 상인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한 상인은 청소 중인 구청 직원을 향해 "장사도 못 하게 길을 막고 난리를 치면 어떡하냐. 지금 당장 이 물청소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구청 직원이 "안전과 위생을 위한 필수 조치"라며 맞서면서 현장에는 한동안 고성이 오갔다.
화재 당시 마감을 하다 대피했다는 인근 카페 사장은 "다행히 가게 피해는 없지만, 여전히 영업을 못 하고 있다"며 막막함을 전했다. 생존을 걱정하는 상인과 행정을 집행하는 공무원 사이의 간극은 화재 잔해만큼이나 깊어 보였다.
세찬 물줄기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여전히 탄내와 매연이 가득했다. 시청역 역주행 사고의 아픔이 채 씻기기도 전에 다시 찾아온 비극의 현장에는, 물리적인 청소만으로는 도저히 씻어낼 수 없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