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순간]<4> 하석주 "멕시코전 백태클, 내 인생 단 한 번의 퇴장"…①
  • 유성현 기자
  • 입력: 2011.10.21 15:13 / 수정: 2011.10.21 15:13

▲ 모교인 아주대학교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하석주 감독.<사진 - 노시훈 기자>
▲ 모교인 아주대학교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하석주 감독.
<사진 - 노시훈 기자>

[유성현 기자] 이처럼 굴곡 있는 축구 인생을 가진 이가 있을까.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는 A매치 6경기 연속골 기록으로 대표팀 역사를 새로 썼고, 사상 첫 월드컵 선제골에 이어 곧바로 퇴장을 당해 16강행 실패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한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던 선수. 바로 하석주(43) 아주대 감독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과 지난해 남아공월드컵에서 원정 첫 16강을 달성한 한국 축구. 한때는 16강 진출이 전 국민의 염원일 때가 있었다. 1990년대 태극마크를 가슴에 품었던 선수들은 수많은 기대와 부담 속에서 혼신을 힘을 다했다. 비록 세계의 벽은 높았지만 그들이 흘린 땀방울은 2002년 이후 한국 축구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

하 감독 또한 1990년대 대표팀의 월드컵 도전사에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왼발의 달인'이라 불리던 화려한 선수 시절을 뒤로 하고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열고 있는 그에게는 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대표팀의 추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더팩트>은 지난 18일 아주대학교에서 하 감독을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하석주는 1990년대 축구 대표팀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두 번의 월드컵을 경험했다.
▲ 하석주는 1990년대 축구 대표팀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두 번의 월드컵을 경험했다.

◆ A매치 6경기 연속골 신화…'왼발의 달인' 날아오르다

최근 대표팀 주장 박주영은 A매치 3경기 연속골을 터뜨리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그에게 쏠리는 기대와 관심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하지만 하석주 감독이 과거 대표팀 시절 받았던 관심은 그 이상이었다. 아직도 깨지지 않은 A매치 6경기 연속골 기록의 주인공이 바로 하 감독이다.

"그 기록이 역사에 남아 있다는 건 기분이 좋아요. 하지만 당시에는 매 경기 골을 넣을수록 부담이 많았던 게 사실이에요. 경기를 치를 때마다 주변에서 기대가 엄청났거든요. 한때는 이제 기록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지금도 제 기록을 후배들이 깨줬으면 하고 충분히 깰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차라리 그게 속 시원하거든요.(웃음)"

태극마크를 품에 안으면 날아오르는 그의 활약에 국민들의 관심은 점차 고조됐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둔 1997년에도 A매치에서만 3골 8도움 맹활약을 펼쳤다. 특히 그의 왼발로 만들어지는 수많은 패스와 날카로운 프리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대표팀에서 맹활약을 이어가던 그를 국민들은 '왼발의 달인'이라 불렀다.

"1997년 도쿄대첩 당시에는 국민적으로 축구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죠. 한번은 비행기 안에서 기내 방송으로 '여기에 유명한 축구선수가 타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승객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니까 기장이 무슨 일인가 하고 알아본 거죠. 당시 기장이 프랑스인이었는데 마침 1998년 월드컵 개최지가 프랑스여서 관심이 높았던지 저를 보고 싶다고 했어요. 덕분에 비행기 조종실에도 가봤죠.(웃음)"

▲ 하 감독은 두 번의 월드컵에서 자신의 큰 실수로 승리를놓쳤다고 여겼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당시의 아픔이응어리 져 있었다.
▲ 하 감독은 두 번의 월드컵에서 자신의 큰 실수로 승리를
놓쳤다고 여겼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당시의 아픔이
응어리 져 있었다.

◆ 두 번의 월드컵, 영광과 좌절이 뒤섞인 '첫 승 도전기'

하석주 감독의 머릿속에 자리한 월드컵의 기억은 영광과 좌절의 경험이 뒤섞여 있다.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대표팀을 본선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정작 본선에서 아쉬운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 결과의 중심에 하석주의 이름도 오르내렸다. 월드컵 본선 첫 승을 노렸던 1994년 미국 월드컵을 돌아보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크나큰 아쉬움이 묻어났다.

"제게 월드컵 본선 무대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죠. 1994년 미국 월드컵 첫 경기 스페인전에서 2-2로 비기며 선전했고, 2차전 볼리비아전이 첫 승의 기회였죠. 그런데 승리에 대한 부담감이 컸어요. 득점 없이 후반 종료 직전까지 갔는데 제가 황선홍과 패스를 주고받고 일대일 상황을 맞았는데 왼발 슈팅이 골키퍼에 막혔죠. 두고두고 그 슈팅은 아쉬움이 남아요. 월드컵 첫 승과 16강 진출이 그 때 이뤄졌을 수도 있었는데…."

1994년의 실패를 딛고 4년의 기다림 속에서 맞이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하지만 하 감독에게는 더욱 큰 시련을 안긴 대회였다. 그는 유일하게 최종예선 전 경기에 출장하며 대표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떠올랐다. 기량이 만개했다는 평가를 들으며 컨디션도 좋았다. 이번에야말로 일을 내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선수들이 똘똘 뭉쳐서 첫 승을 거두자는 의욕이 강했어요. 첫 경기 멕시코전을 앞두고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죠. 정말 붙어보니 해볼 만 했어요. 운 좋게 프리킥으로 골도 넣었고요. 사상 첫 월드컵 선제골이었죠. 분위기가 얼마나 좋았겠어요. 첫 승에 대한 기대도 높아졌고요. 그 때만 해도 설마 2분 만에 제가 퇴장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 멕시코전 선제 득점 후 2분 만에 퇴장 명령을 받은 하석주.
▲ 멕시코전 선제 득점 후 2분 만에 퇴장 명령을 받은 하석주.

◆ "멕시코전 백태클, 축구 인생 단 한 번의 퇴장"

당시 바뀐 백태클 규정이 문제였다. 당시 대회는 상대 선수의 양 발을 동시에 겨냥하면 가차 없이 퇴장 명령을 받았다. 전반 27분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터뜨린 그는 2분 뒤 멕시코의 라미레즈에게 백태클을 시도했다가 그라운드를 떠났다. 하 감독의 태클은 상대 선수의 한 발에 걸렸을 뿐이었다. 경기 후 상벌위원회의 분석 결과 '고의성이 없었다'고 판단돼 추가 징계는 없었다. 하지만 뼈아픈 1-3 역전패는 되돌릴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선수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퇴장을 당한 적이 없었죠. 그런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나왔어요. 퇴장은 상상도 못했어요. 남미 선수들이 액션이 워낙 크잖아요. 난데없이 빨간 색이 보이니 정말 하늘이 무너지더라고요. (고개를 숙이며) 그 대회는 저로 인해 모든 걸 망친 셈이죠. 멕시코전 역전패, 2차전 네덜란드전 0-5 참패, 차범근 감독님 경질 등 저 때문에 많은 일이 생겼어요. 속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죠."

2패로 16강 진출 실패가 확정되고 맞이한 벨기에전. 엄습하는 퇴장의 두려움과 부담감 속에서도 하 감독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경기에 나섰다. 0-1로 뒤지던 후반 26분, 페널티지역 왼쪽에서 그가 차올린 프리킥은 유상철의 동점골로 이어지며 값진 무승부를 거뒀다. 하 감독의 가슴 속을 무겁게 짓누르던 마음의 짐이 조금이나마 덜어진 순간이었다.

"속죄감 속에서 벨기에 전에 나섰는데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상대 선수랑 또 부딪쳐서 퇴장 받을까봐요. 마음 속 짐이 워낙 컸기 때문에 정말 죽을 듯이 뛰었죠. 정말 고맙게도 대표팀 동료들이 머리에 피날 때까지 열심히 해줘서 1-1로 비겼어요. 국민들도 제게는 비난을 보내더라도 선수들에게는 칭찬을 해주시더라고요. 정말 다행이었죠."

<①편 끝>…②편(10월 27일)에서는 월드컵 이후 명예회복의 순간, 현재 대표팀에 대한 조언, 축구인 하석주의 목표 등이 이어집니다.

<글 = 유성현 기자, 사진 = 노시훈 기자>
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yshalex@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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