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위기는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이 끝난 뒤 손흥민(34·LAFC)을 둘러싼 공기는 무거웠다. 한국 축구의 조별리그 탈락과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경기력 속에서 주장 손흥민도 비판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월드컵을 간절히 준비했던 그였지만 결과는 참담했고, 세월도 어느덧 전성기의 끝을 이야기하는 나이에 다다랐다.
그대로 주저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손흥민은 변명하거나 책임을 떠넘기는 대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답했다. 다시 뛰었고, 더 많이 움직였으며, 결국 골을 터뜨렸다.
손흥민은 월드컵 이후 15일 동안 공식전 5경기에서 6골을 몰아쳤다. MLS 정규리그에서는 4경기 연속골을 기록했고, 올스타전까지 포함하면 5경기 연속 득점이다. LA 갤럭시와의 ‘LA 더비’에서 리그 첫 골을 신고한 뒤 레알 솔트레이크전에서 1골 1도움, 캔자스시티전에서 1골, MLS 올스타전에서 2골을 기록했다. 이어 서부 콘퍼런스 선두 밴쿠버를 상대로도 골망을 흔들었다.
2일 밴쿠버전 득점은 손흥민의 진가를 압축해 보여준 장면이었다. LAFC는 전반 36분까지 단 하나의 슈팅도 기록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때 손흥민이 팀의 첫 슈팅을 첫 유효 슈팅이자 선제골로 연결했다. 전반 37분 데니스 부앙가의 패스를 받아 오른발로 공을 잡은 뒤 몸을 180도 돌려 골문 구석을 찔렀다.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원샷 원킬’. 그러나 그 골의 가치는 기술에만 있지 않았다. 팀이 가장 어려울 때, 동료들이 돌파구를 찾지 못할 때, 책임져야 할 선수가 직접 답을 내놓았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비록 손흥민의 선제골은 후반 뮐러의 페널티킥 1-1 동점골로 승리를 끌어내진 못했지만 이날 경기의 유일한 필드골로 빛을 발했다.

손흥민의 연속골은 단순한 득점 행진이 아니다. 월드컵 실패 뒤 찾아온 좌절과 의심, 나이에 대한 우려를 스스로 넘어서는 회복의 과정이다. 많은 선수는 전성기에는 박수를 받지만, 진정한 가치는 내리막과 위기에서 드러난다. 잘될 때 웃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느끼는 순간 다시 신발 끈을 묶는 일이 어렵다.
손흥민은 공개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다. 월드컵 실패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묵묵히 소속팀으로 돌아가 훈련하고, 뛰고, 골을 넣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섰고, 해명보다 결과가 먼저였다. 지도자와 행정가들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한국 축구의 현실과 대비되기에 그의 침묵과 분투는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옛말에 ‘백절불굴(百折不屈)’이라고 했다. 백 번 꺾여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손흥민이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위대한 선수는 넘어지지 않는 선수가 아니다. 넘어졌을 때 남보다 먼저 일어나는 선수다.
물론 MLS에서의 연속골이 월드컵 실패를 지워주는 것은 아니다. 국가대표팀의 부진과 한국 축구의 구조적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실패 이후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는 손흥민이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명성에 기대지 않고, 현재의 자리에서 다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그것이 프로의 책임이고 리더의 품격이다.
손흥민의 시간은 이제 전성기의 출발점이 아니라 마지막 구간을 향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해가 질 무렵의 빛이 때로는 한낮보다 더 깊고 길게 남는다. 손흥민의 최근 골들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다.
월드컵의 악몽은 손흥민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왜 오랫동안 한국 축구의 주장으로 사랑받았는지를 다시 보여줬다. 위기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끝내 결과로 말하는 사람.
손흥민은 골을 넣은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법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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