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축구 종가 잉글랜드의 심장, 웸블리 스타디움이 아시아 국가에 함락됐다. 상대는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 1일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이 이끄는 일본 국가대표팀은 잉글랜드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며 A매치 5연승의 파죽지세를 이어갔다. 슈팅 수 7대 19, 점유율 30%대 70%라는 절대적 열세 속에서도 기어코 승리를 쟁취해 낸 일본의 저력은 세계 축구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웃 나라의 낭보를 지켜보는 한국 축구 팬들의 입맛은 쓰기만 하다. 같은 시기, 유럽 원정 2연전에 나선 한국 대표팀은 코트디부아르(0-4 패)와 오스트리아(0-1 패)에 연달아 덜미를 잡히며 무득점 5실점이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경기 결과보다는 내용 자체가 팬들의 기대에 못 미쳐 다가오는 2026 북중미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 축구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이 극명한 대비 속에서 우리는 뼈아픈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과연 개개인의 기량만 놓고 보았을 때 일본이 한국을 압도하는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한국의 공격진은 유럽 빅리그를 누비는 톱클래스 선수들로 즐비하다. 그러나 '팀'으로 맞붙었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상반된다. 현재 한국 축구는 전술적 구심점 없이 스타플레이어들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이른바 '해줘' 축구의 늪에 빠져 있다.

이번 원정에서 드러난 공격 전개의 답답함이 이를 증명한다. 오스트리아전 전반전, 한국은 손흥민, 이강인, 이재성을 앞세운 강한 전방 압박으로 슈팅 수 6대 1의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그러나 득점이라는 마침표를 찍는 데는 철저히 실패했다. 전방위 압박으로 볼을 탈취한 이후, 유기적인 공간 창출이나 약속된 연계 플레이 없이 선수 개개인의 번뜩임에만 기댔기 때문이다. 세밀한 전술적 움직임이 결여된 공격은 숱한 기회를 날려버렸고, 결국 '2경기 무득점'이라는 초라한 결말로 이어졌다.
수비진의 엉성한 조직력과 잦은 실책은 더욱 심각하다. 홍명보 감독은 이번 2연전에서 김민재를 축으로 한 스리백 전술을 가동했지만, 치명적인 약점만을 노출했다. 페널티 박스 안에 다수의 수비수가 포진해 수적 우위를 점하고도, 상대 공격수의 침투 패스와 슈팅 공간을 전혀 제어하지 못했다. 조직적인 라인 컨트롤 대신 수비수 개개인의 대인 방어에 쫓기다 보니 상대의 개인기에 수비벽이 속절없이 허물어졌고, 이는 고스란히 5실점 참사로 직결됐다. 더구나 상대는 브라질이나 잉글랜드가 아니고, 두 팀 모두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이 한국보다 낮은 팀이다.
반면, 잉글랜드전에서 결승골을 만들어낸 일본의 움직임을 복기해 보자. 전반 23분, 중원에서 강한 압박으로 공을 탈취한 뒤 미토마가 쇄도하고, 왼쪽 측면의 나카무라를 거쳐 다시 미토마의 간결한 마무리로 이어졌다. 이는 결코 우연이나 개인의 영웅적 돌파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었다. 톱니바퀴처럼 약속되고 훈련된 움직임, 즉 '시스템'이 만들어낸 득점이었다.
7만여 관중의 응원을 받는 홈 팀을 상대로 무실점의 클린시트를 작성한 것도 놀랍다. 일본은 지난해 10월 14일 기린 챌린지컵에서 '삼바 축구' 브라질을 3-2로 물리친 것을 시작으로 가나전(2-0승), 볼리비아전(3-0승), 스코틀랜드전(1-0승)에 이어 잉글랜드전(1-0승)까지 승리하며 A매치 5연승과 4경기 연속 클린시트의 완벽에 가까운 공수조화를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 체제 아래서 오랜 기간 흔들림 없이 다져온 탄탄한 조직력의 산물이다. 일본은 특정 에이스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누가 그라운드를 밟든 일정한 경기력과 전술적 완성도를 유지한다. 화려함은 덜할지 몰라도, 팀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원팀(One Team)'의 무서움을 웸블리에서 스스로 증명해 냈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이를 가능케 한 그라운드 밖의 힘이다. 일본의 이 같은 괄목할 성장은 선수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된 일본축구협회(JFA)의 치밀한 행정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장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협회는 장기적인 비전 아래 모리야스 감독에게 굳건한 신뢰와 지원을 보냈다. 벤치와 행정부가 2인 3각처럼 호흡을 맞추며 진정한 의미의 '원팀'을 구축한 것이다. 사령탑 선임 과정부터 온갖 잡음에 시달리며 행정 난맥상을 고스란히 노출한 작금의 대한축구협회 상황과 뼈아프게 대조되는 대목이다.
한국 축구의 퇴보와 일본 축구의 진화. 이 서늘한 현실은 다가오는 북중미 월드컵을 향해 강력한 경고장을 던지고 있다. 결국 해답은 선수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전술을 만드는 데 있다. 지금은 감독의 머릿속 구상을 선수들에게 무리하게 강요할 때가 아니다. 그보다는 각자 소속팀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는 선수들의 장점이 대표팀에서도 온전히 발휘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리백이든 포백이든 현대 축구에서 모두 훌륭한 전술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 전술을 그라운드 위에서 100% 소화해 낼 수 있는 선수를 갖추고 있는지, 선발했는지를 냉정하게 먼저 따져봐야 한다. 웸블리에서 잉글랜드를 무너뜨린 일본의 저력은 결국 선수들의 장점을 극대화한 맞춤형 시스템과 행정의 조화에서 나왔다. 혼돈에 빠진 한국 축구가 다가오는 월드컵을 위해 무엇부터 쇄신해야 할지, 그 명확한 답은 이미 그라운드 위에 나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