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프리즘] 서포터의 분노는 열정이다
  • 최정식 기자
  • 입력: 2017.04.20 05:00 / 수정: 2017.04.20 05:00
FC안양 서포터들이 홍염을 이용해 응원하고 있다.
FC안양 서포터들이 홍염을 이용해 응원하고 있다.

[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축구광인 영국 작가 닉 혼비는 <피버 피치>에서 명경기를 위한 일곱 가지 조건에 대해 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심판의 편파 판정'이다.

혼비는 편파 판정으로 인해 경기에 지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팀인 아스널이 피해자가 되는 쪽이 더 좋다고 했다. "완벽한 축구 관전 경험을 구성하는 데 분노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심판이 눈에 띄지 않는 경기는 결코 좋은 경기가 아니다. 심판을 노려보고, 소리를 지르면서 편파 판정에 당했다는 느낌을 받아야 열정적으로 경기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팬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편파 판정만은 아니다. 19일 FC서울과 FC안양의 FA컵 32강전이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 원정응원석에 예상대로 '홍득발자(紅得發紫)'가 쓰인 대형 걸개가 등장했다. 안양 LG 치타스가 2004년 1월 연고지를 옮기면서 FC서울이 됐다. 허탈감과 배신감에 빠진 안양 팬들은 시민구단 창단에 나섰고 2013년 12월 FC안양이 출범됐다.

안양은 팀의 상징색을 치타스가 쓰던 붉은 색이 아닌 보라색으로 했다. 옛 중국 관직에서 최고위 관리가 입는 관복색은 보라다. 그 다음 직위의 관복은 붉은 색이다. '아주 붉은 것은 이미 보라색'이라는 말은 안양 서포터의 묵은 한을 상징한다. 한 클럽의 정체성 자체가 다른 한 클럽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되는 특이한 경우다.

서울은 K리그 클래식, 안양은 K리그 챌린지에 속해 있어 만날 일이 없었지만 결국 FA컵에서 격돌하게 됐다. '13년 만의 복수'는 미디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정작 상대인 서울 구단과 서포터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일부 서울 팬들이 '홍득발자'를 비아냥대는 문구를 들어올리기는 했지만 '도대체 왜 그러냐'는 정도의 대응이었다.

자신들의 서포터가 이 경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아는 안양 선수들은 필사적이었지만, 서울 선수들에게는 수원FC와의 슈퍼매치와는 전혀 다른 승부였다. 상대를 라이벌로 여기지도 않고 경기를 더비로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약팀을 물리치고 16강에 진출하는 것이 관심사였을 뿐이었다.

일방적인 분노마저도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전반 27분 서울 윤일록의 헤딩골이 터졌고, 8분 뒤 윤일록이 이번에는 발로 추가골을 넣었다. 그래도 "부숴버려"라는 외침은 이어졌다. 클래식과 챌린지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경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안양 서포터들은 분전하는 김민균의 이름을 연호했고, 그의 슈팅이 서울 골키퍼 유현의 선방에 막히자 안타까운 탄성을 내질렀다.

결국 경기는 안양의 0-2 패배로 끝났다. 안양 서포터들은 경기가 끝난 뒤에도 떠나지 않고 계속 "안양"을 외쳤다. 어쩌면 그들에게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분노의 표출이었는지도 모른다.

킥오프 직전 안양 서포터들이 홍염과 자주색 연막탄으로 관중석을 마치 불바다처럼 만들었을 때 눈살을 찌푸린 이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들을 버린 서울을 향해 '북패(북쪽의 패륜)'라는 도발적인 구호를 보내는 것이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분노야말로 그들이 축구를 사랑하는 방식인 것을.


malishi@tf.co.kr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이메일: jebo@tf.co.kr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