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네덜란드, 증오가 만들어낸 죽음의 라이벌전
  • 김성범 기자
  • 입력: 2012.06.11 16:17 / 수정: 2012.06.11 16:17

죽음의 조라 명명됐던 유로 2012 폴란드-우크라이나 B조 첫 라운드가 끝났다. 덴마크가 네덜란드를 1-0으로 꺾는 예상치 못한 돌풍을 일으키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꽤나 재미있게 됐다. 특히 유럽 축구 속 소문난 앙숙으로 유명한 독일과 네덜란드의 맞대결은 그들의 라이벌사를 통틀어 가장 큰 파열음을 낼 것으로 예상되어 기대가 된다. 역사적 이유로 인해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증오해 온 양국이 유로 2012 생존 여부가 걸린 승부처에서 맞부딪치기 때문이다.

증오가 낳은 유럽 최고의 라이벌전
증오가 낳은 유럽 최고의 라이벌전

독일과 네덜란드의 라이벌 관계는 1974년 서독 월드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전만 해도 두 팀의 관계는 라이벌이라고 명명하기가 힘들었다. 독일은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는 등 당대 최강의 팀이었던 반면 네덜란드는 이와 견줄 수 없는 약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요한 크루이프, 요한 네스켄스 등 슈퍼 스타들을 화수분처럼 쏟아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달라졌다. 비로소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성공한 네덜란드는 본격적으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라이벌 의식이 단순히 땀과 기량의 승부를 벗어나 역사적 이유까지 작용하는 바람에 더욱 불붙기 시작했다.

“점수 차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1-0으로 이겨도 독일에게 수모를 안기는 데 부족함이 없다. 독일인들은 어머니, 아버지, 두 명의 내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 때문에 독일과 만나면 내 분노는 급격히 끌어오른다.”

1974년 월드컵 결승전 직전 네덜란드의 핵심 미드필더였던 빔 반 하네겜이 남긴 각오다. 보통 경기에 임하는 각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임을 알 수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주도 아래 전 유럽을 전쟁터로 만든 나치 독일의 만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당시 네덜란드인들의 울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러한 정신은 한 세대 아래인 선수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됐다.

당연히 난투극은 두 팀 간 경기에 있어서 반드시 촉발되는 관례처럼 여겨졌다. 독일의 명수문장이었던 토니 슈마허와 네덜란드 수비수 후브 스테벤스는 경기장에서 주먹다짐을 벌였고, 네덜란드의 날개 레네 반 데 케르코프는 독일의 스타 플레이어 베른트 슈스터에게 강펀치를 날려 눈두덩이를 시퍼렇게 만들기도 했다. 로날드 쾨만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독일 선수들을 “쓰레기”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경기 도중 루디 펠러의 곱슬머리를 잡아 당기고 얼굴에 침을 내뱉었다.

이에 독일의 간판 공격수였던 칼 하인츠 루메니게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증오를 축구의 콘셉트로 잡다니 정말 수치스럽고 불쌍하게 느껴진다”라고 독설로 맞섰다. 맞붙기만 하면 네덜란드 선수들에게 헤꼬지를 당하니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적대적 태도는 경기장 밖으로 확산됐다. 일반 팬은 물론 언론, 예술가 등 분야와 인물을 가리지 않았다. 상대방을 향한 조롱은 기본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네덜란드가 탈락하자 한 독일 밴드는 “네덜란드 없는 월드컵이라니 정말 재미있겠구나”라는 제목이 담긴 노래를 발표해 오렌지들을 자극했다. 유로 2004 조별 라운드에서 독일이 탈락하자 네덜란드 팬들은 “아이고 불쌍해라. 독일은 끝났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약올렸다.

가장 최근의 메이저 대회인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네덜란드가 결승전에 오르자 독일인들의 심사가 뒤틀렸는지 <빌트>는 ‘네덜란드는 사실상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제호의 기사를 내보냈다. 아르옌 로벤 등 네덜란드 주축 선수들이 뮌헨 소속이라는 점을 들어 결승 진출을 깎아내린 것이다. 가만 지켜보고 있을 네덜란드 언론이 아니다. <데 텔레그라프>는 ‘실력이 얼마나 부족하면’이라는 기사를 내보내며 빌트의 기사를 반박했다. 그야말로 축구를 통한 양국의 자존심을 건 맞대결이라 볼 수 있다.

이번 유로 2012도 다를 것 없겠다. 1라운드가 끝난 현재 네덜란드는 덴마크에 의외의 일격을 당하며 조 최하위로 내려앉았다. 반면 독일은 득점 기계 크리스티아노 호나우도를 앞세운 포르투갈을 1-0으로 제압하며 상쾌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양 팀의 분위기가 극명히 엇갈란 거운데 두 팀은 오는 14일 새벽 3시 45분(한국 시각) 하르키프 메탈리스트 스타디움에서 맞붙는다. 포르투갈에서 벌어진 유로 2004 조별 라운드 이후 8년 만에 메이저 대회에서 맞붙게 되는 양 팀의 통산 전적은 34전 14승 14무 10패로 독일이 근소하게 앞서 있다(메이저 대회 상대 전적 7전 3승 2무 2패로 독일 우세). 네덜란드로서는 벼랑 끝에서 독일과 맞서게 된다.

독일이 네덜란드를 약 올리기 딱 좋은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그 때문인지 제3자라 할 수 있는 잉글랜드의 <데일리 메일>은 독일의 중앙 수비수 마츠 훔멜스가 네덜란드의 유로 2012 조기 탈락을 학수고대하고 있다며 흥미로운 시선을 보냈다. 훔멜스는 건강한 라이벌 관계를 언급하며 독일의 승리를 자신하는 멘트를 남겼지만, 그럼에도 두 팀의 맞대결은 여전히 자극적 소재였던 모양이다.

이처럼 경기 전부터 팬들의 비상한 관심을 한데 모으고 있는 두 거인의 맞대결이다. 독일이 이기면 네덜란드는 사실상 짐을 싸야 한다. 네덜란드가 이기면 16년 만에 유로 정상을 꿈꾸는 독일의 우승 전선에 먹구름이 끼게 된다. 유럽 국가대항전 최강자들의 건곤일척, 죽음의 조에서 죽음의 라이벌전이 연출되고 있다.

독일-네덜란드 역대 메이저 대회 경기 결과
독일-네덜란드 역대 메이저 대회 경기 결과

1974년 서독 월드컵 결승전
서독 2-1 네덜란드
득점 : 폴 브라이트너(전반 25분, PK), 게르트 뮐러(전반 43분 이상 서독), 요한 네스켄스(전반 2분, PK 이상 네덜란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준결승리그
서독 2-2 네덜란드
득점 : 루디거 아브람지크(전반 3분), 디에터 뮐러(후반 25분 이상 서독), 아리에 한(전반 27분), 레네 반 데 케르코프(후반 39분 이상 네덜란드)


1980년 프랑스 유럽선수권대회 조별 라운드
서독 3-2 네덜란드
득점 : 클라우스 알롭스(전반 20분, 후반 15분, 후반 20분 이상 서독), 요니 렙(후반 34분, PK), 레네 반 데 케르코프(후반 40분 이상 네덜란드)


1988년 서독 유럽선수권대회 조별 라운드
서독 1-2 네덜란드
득점 : 로타어 마테우스(후반 10분, PK), 로날드 쾨만(후반 29분, PK), 마르코 반 바스텐(후반 43분 이상 네덜란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6강전
서독 2-1 네덜란드
득점 : 위르겐 클린스만(후반 6분), 안드레아스 브레메(후반 37분 이상 서독), 로날드 쾨만(후반 44분, PK 이상 네덜란드)


1992년 스웨덴 유럽선수권대회 조별 라운드
네덜란드 3-1 독일
득점 : 프랑크 레이카르트(전반 4분), 롭 비치게(전반 15분), 데니스 베르캄프(후반 27분 이상 네덜란드), 위르겐 클린스만(후반 8분 이상 독일)


포르투갈 유로 2004 조별 라운드
네덜란드 1-1 독일
득점 : 루드 반 니스텔로이(후반 36분 이상 네덜란드), 토어스텐 프링스(전반 30분 이상 독일)



<베스트 일레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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