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개그콘서트'는 최전성기를 누리던 2000년대부터 시청률 30%를 오르내리며 스타 등용문의 자존심으로 군림했으나 결국 시장논리에 밀려 폐지 통고를 받았다. 왼쪽부터 개콘 주요멤버로 활약해온 김준호 김대희. /남용희 기자 |
'개콘' 폐지는 코미디프로그램 '사망 선고', 개그 예능인들의 '비애'
[더팩트|강일홍 기자] 희극과 비극은 원래 동일체란 역설이 있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등으로 대비되는 양 극단의 상반된 감정의 산물이면서도 결과는 동일한 눈물과 감동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탓이다. 때로 희극인들은 슬퍼도 웃어야 하는 숙명 때문에 스스로 비애를 안고 산다고 말한다. 이는 누군가를 즐겁게 해준다는 사명감에 기꺼이 남모를 애환을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마 무대가 사라지면 눈물도 웃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 방송가에 사상 처음으로 지상파TV에서 코미디프로그램이 문을 닫는 '지상파 無 코미디 방송'의 암흑기가 도래했다. 지상파 유일한 코미디 명맥을 지켜온 KBS2 '개그콘서트'(또는 '개콘')가 결국 폐지라는 수순을 밟고 있다. KBS 측은 "달라진 방송 환경과 코미디 트렌드의 변화,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계 등 여러가지 이유로 새로운 변신을 위해 잠시 휴식기를 갖는다"고 입장을 밝혔다. 폐지설로 애드벌룬을 띄운지 일주일 만에 사실상 폐지를 공식화한 셈이다.
앞서 KBS는 '개콘' 폐지설이 방송가 안팎에 나돌자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지난 7일 사실 여부를 확인 요청한 <더팩트>에 KBS 측은 '사실무근'이 아닌 '아직'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애매모호한 여지를 남겼다. 하지만 이 때 이미 제작진은 사측으로부터 폐지방침을 통보받아 출연자들에게 스케줄 조율까지 하고 있던 중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개그맨들의 반발을 의식하고 여론의 향배를 저울질하는데 시간을 끈 궁색한 모양새가 됐다.
'개그콘서트'는 KBS 간판 예능의 상징이다. 1999년 첫 방송을 시작한 이후 21년간 수많은 개그맨들과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큰 사랑을 받았다. 개그콘서트 리허설 모습. /이새롬 기자 |
◆ 유일한 명맥 '개그콘서트' 폐지, 방송 사상 첫 '지상파 無 코미디' 시대
'개그콘서트'의 폐지 조짐은 편성이 흔들리면서 일찌감치 예고됐다. 일요일 밤 9시대를 책임져온 '개콘'은 지난해 12월 토요일로 편성을 옮겼다가 불과 4개월 만에 또다시 금요일로 이동됐다. 방송사 내부 기류에 민감한 출연자들 사이에서는 '폐지설'이 언급된 직후부터 아예 기정사실로 단정하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일부 개그맨들은 "최장수 개그프로그램이라는 위상과 자부심보다 천덕꾸러기같은 핑퐁 신세에 차츰 의욕을 잃어갔다"고 털어놨다.
KBS가 고심 끝에 '개그콘서트'의 폐지를 결정한 데는 무엇보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과 트렌드 변화, 갈수록 가중되는 현실적 어려움 때문이다. 포털 사이트, 유튜브, 넷플릭스 등 다매체 환경 속에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시청자들의 니즈는 크게 바뀌었다. 안타깝게도 개그맨들 스스로 자초한 부분도 없지 않다. 일부 인기 개그맨들 중엔 '고된 사명감이나 노력' 보다는 케이블과 종편 등 '쉽고 편한 먹방 예능'에 길들여져 초심을 잃었다는 지적이다.
KBS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과 트렌드 변화, 갈수록 가중되는 현실적 어려움을 이유로 '개그콘서트'의 폐지를 결정했다. 사진은 '웃자! 대한민국' 송해 헌정 공연 기자회견 당시 감사패를 주고받는 엄용수 코미디협회장과 개그맨 박준형. /더팩트 DB |
◆ 유재석 신동엽 강호동 박수홍 등 개그프로그램이 키운 명품 예능 MC
'개그콘서트'는 KBS 간판 예능의 상징이다. 1999년 첫 방송을 시작한 이후 21년간 수많은 개그맨들과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최전성기를 누리던 2000년대에는 시청률 30%를 오르내리며 스타 등용문의 자존심으로 군림했다. 신곡을 낸 인기가수들이나 영화 개봉을 앞둔 정상급 스타배우들이 스페셜게스트로 앞다퉈 '개콘' 무대에 서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심지어 방청석에 앉기만 해도 이슈가 될 만큼 매주 방송 때마다 화제를 뿌렸다.
유행과 트렌드는 바뀌기 마련이고, 방송 프로그램은 수요공급 원칙(시청률)과 경제논리(수익성)에 가장 민감한 콘텐츠다 보니 변화는 불가피하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는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갑작스런 폐지 소식은 아쉽다. 무엇보다 다양성이나 공공성의 가치가 무시돼선 안된다는 점이다.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에서 잔뼈가 굵은 한 고참 PD는 "다층 시청자를 가진 대한민국의 대표 방송에 코미디 장르가 사라진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삭막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개그콘서트' 폐지는 돌이킬 수 없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SBS 개국 초기 KBS에서 스카웃된 개그맨들은 단기간에 채널 인지도를 키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케이블과 종편채널 역시 같은 길을 밟았다. 개그 프로그램은 유재석 신동엽 강호동 박수홍 등 명품 예능MC들이 탄생하는 요람 같은 구실을 했고, 예능 전성기의 밑거름이 됐다. 궁극적인 피해자는 일터를 잃은 개그맨들이 아니라 결국 시청자들이다. 공영방송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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