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근의 Biz이코노미] '추론'과 싸우는 삼성의 '이중고', 왜 미리 단정하나
입력: 2019.05.28 23:38 / 수정: 2019.05.28 23:38
삼성은 지난 23일 이례적으로 공식 입장자료를 내고 삼성바이오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해 추측성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더팩트 DB
삼성은 지난 23일 이례적으로 공식 입장자료를 내고 "삼성바이오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해 추측성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더팩트 DB

"추측성 보도, 자제해 주세요" 씁쓸한 삼성의 '읍소'

[더팩트 | 서재근 기자] 지난 3월이었다. 방송인 정준영의 불법 동영상 촬영·유포 혐의에 대한 경찰 수사가 한창이었을 당시 예기치 못한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정 씨와 함께 KBS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 출연했던 배우 차태현과 개그맨 김준호가 수백만 원대 내기 골프를 했다는 것이다. 보도 직후 두 사람은 논란이 야기됐다는 사실 자체에 사과하면서도 "그때그때 현장에서 돈을 돌려줬다"며 혐의를 부인하는 입장문과 함께 출연 중인 모든 방송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2개월여가 지난 지금 이들에 대한 경찰 수사 결론은 '무혐의'로 가닥이 잡혔다.

재계로 눈을 돌려보자. 지난 23일 삼성은 검찰이 진행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이하 삼성바이오) 수사와 관련해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추측성 보도를 자제해 달라"며 호소하는 내용의 공식 자료를 냈다.

이례적인 '호소문'의 대상은 언론이었다.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내용이 일부 언론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보도되고 있고, 진실규명의 초기 단계임에도 유죄라는 단정이 확산하면서 임직원과 회사는 물론 투자자와 고객들도 돌이킬 수 없는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게 삼성 측의 설명이다.

총수가 구속되는 초유의 위기 상황에서도 회사 차원의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던 삼성이 전례 없는 행보를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삼성 윗선이 증거인멸 등 일련의 모든 행위를 지시했고, 결국 검찰 수사 칼끝은 JY(이재용 부회장)를 향하고 있다'는 식의 관측 또는 추측성 보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부회장은 올해들어 한 달에 한 번꼴로 해외 출장을 떠났다. 비메모리 분야 133조 원 투자 계획을 밝히고, 5G 경쟁력 강화를 위해 아랍에미리트(UAE)에 건너가 셰이크 모하메드 빈 자예드 알 나흐얀 아부다비 왕세제 만난 데 이어 최근에는 일본 현지 양대 통신사 경영진과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등 미래 신성장 산업 육성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현장 경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영업맨'을 자처하며 글로벌 파트너들과 스킨십에 열중하는 이때 '범법행위를 총지휘한 혐의로 검찰 소환이 임박한 삼성의 부회장'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는 것은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파트너십에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다. 삼성에서 강조한 '돌이킬 수 없는 큰 피해' 역시 외줄에 올라선 대외 신뢰도에 대한 우려와 무관하지 않다.

일부 언론에서는 검찰이 삼성바이오와 삼성에피스 수사 과정에서 확보한 자료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육성 파일 등을 복원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사정 당국의 수사가 이 부회장을 향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이선화 기자
일부 언론에서는 검찰이 삼성바이오와 삼성에피스 수사 과정에서 확보한 자료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육성 파일 등을 복원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사정 당국의 수사가 이 부회장을 향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이선화 기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사정 당국의 수사가 그룹 윗선을 향한다는 추측의 근거다. '검찰에서 삼성바이오 자회사 삼성바이오에피스 임원들이 이재용 부회장과 통화한 육성파일을 복원했고, 그 속에 의미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삼성바이오 임직원들 노트북에서 'JY', 'VIP', '합병', '미전실' 등 단어를 검색해 관련 문건을 삭제했다' 등이 일부 언론에서 다룬 내용이다.

우리나라 형법 제126조에는 '피의사실 공표죄'가 규정돼 있다. 검찰과 경찰 등 기타 범죄 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거나 감독·보조하는 사람(수사기관)이 직무 수행 과정에서 알게 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하는 행위를 '피의사실 공표죄'로 간주하고, 3년 이하 징역 또는 5년 이하 자격정지에 처한다.

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더라도 사정 당국이 진행하는 일련의 수사 과정이 마치 양파껍질이 벗겨지듯 하나하나 언론 등을 통해 외부에 확산하고, 시시비비를 가릴 틈도 없이 불특정 다수의 귀에 들어감으로써 '범죄자'로 낙인찍혀버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름도 생소한 '피의사실 공표죄'가 재판으로 이어진 사례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확보한 자료가 유죄를 단정할 수 있는 열쇠가 될지 여부를 판가름 하는 것은 기소권을 가진 검찰의 몫이 아니라 법원의 몫이다.

"항상 무혐의 소식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며 차태현과 김준호 두 사람에 대한 경찰 수사와 관련해 한 개그맨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남긴 메시지나 진실 규명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검찰 수사 과정이 사실상 생중계되고, 온갖 '설 풀이'로 이어지는 상황을 지켜봐야만 하는 대기업이 마지못해 던진 호소문이나 화자(話者)와 당사자가 느끼는 씁쓸함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내기골프를 친 사람으로 낙인찍혀버린 두 방송인의 앞날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수사기관의 수사 내용에만 관심을 두고 특정 대기업 총수를 향한 섣부른 단정은 비록 일시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글로벌 리더'를 향해 불법행위를 지시한 최고의사결정권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기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만약 아니라면 그 상처는 누가 치유할 것인가.

likehyo85@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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