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나기 쉬운 환경 속 주민들 두려움 가득

[더팩트|서울=오승혁 기자] "집 근처까지 불이 보일 때는 정말 무서웠어요. 밤이 아니라 낮에 불이 나서 그나마 다행이죠."
28일 오전 '오승혁의 현장'은 전날 대형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을 찾았다. 밤샘 진화 끝에 큰 불길은 잡혔지만 매캐한 탄내는 여전히 코를 찔렀다. 검게 그을린 목재와 엿가락처럼 휜 철제 구조물 사이로 주인을 잃은 가재도구들이 뒤엉켜 있었다. 벽과 지붕이 무너져내린 자리는 어디까지가 집이었고 어디서부터가 골목이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날 낮 구룡마을에서는 경찰과 소방 당국의 현장 감식과 잔불 정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노란 통제선 너머로 소방관들이 잿더미를 뒤척이며 추가 위험을 점검했고, 주민들은 타버린 집터를 멍하니 바라봤다.
불은 전날 오후 3시 50분께 2지구 가건물에서 시작됐다. 메마른 날씨에 강풍까지 겹치면서 불씨는 1·3·7지구와 인근 구룡산 자락으로 삽시간에 번졌다. 소방 당국은 헬기 6대와 장비 110대, 인력 230여 명을 투입했지만 야간 진화에 애를 먹으며 화재 발생 12시간 49분 만인 이날 오전 4시 39분에야 완진 판정을 내렸다.

화재 현장 맞은편 자원센터 근처에서 만난 한 주민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로 코앞까지 불기둥이 치솟는데 너무 무섭더라고요. 다들 자고 있을 밤이 아니라 대낮이라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여러 사람 위험할 뻔 했어요."
피해를 가까스로 피한 구룡마을 위쪽 대모산으로 향하는 골목에서도 긴장은 가시지 않았다. 몇몇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전날 상황을 나누며 서로를 다독였다. 한 주민은 "꽤 먼 곳이었는데도 바람 타고 불씨가 후두둑 날아와 간담이 서늘했다"며 "그래도 내 집까지 안 번진 게 천만다행"이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이번 화재로 19만㎡(축구장 약 26개 면적)가 탔다. 1·2·3지구 77가구 107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고, 대피 도중 30대 여성 한 명이 다리에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강남구는 인근 중학교 체육관과 숙박시설 등에 임시 대피소를 꾸렸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참담했다. 솜과 비닐, 합판, 보온덮개로 얽어맨 판잣집들은 뼈대조차 남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곳곳에 방치된 액화석유가스(LPG) 용기와 얽히고설킨 전선은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주민들은 "불길 속에서 가스통 터지는 굉음이 몇 번이나 쿵쿵 울렸다"고 입을 모았다.

현장에서 발길을 돌릴 때 가장 먼저 시선에 꽂힌 것은 건너편 풍경이었다. 왕복 차도 하나,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매매가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신축 브랜드 아파트들이 솟아 있다. 가건물 잔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뒤편으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유리창과 말끔한 외벽이 겹쳐 보였다.
구룡마을의 대형 화재는 올해 들어서만 벌써 두 번째다. 지난 1월에도 4지구에서 불이 나 수백 명이 대피했다. 불이 날 때마다 취약한 자재, 소방차 진입이 불가능한 미로 같은 골목, 소방용수 부족이 도마 위에 오르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불은 꺼졌지만 현장 수습과 이재민 대책이라는 무거운 과제가 남았다. 잿더미 속에서 건질 것 하나 없는 주민들은 오늘도 불안한 터전에 남아 다음 불길을 걱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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