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대첩’ 29년, 이민성은 또 일본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박순규의 창]
  • 박순규 기자
  • 입력: 2026.10.01 04:38 / 수정: 2026.10.01 04:50
1997년 일본전 결승골의 영웅, AG 4연패 걸린 결승서 다시 일본과 운명적 승부
'전술 논란' 감독 이민성의 마지막 무대
도쿄 대첩의 주인공 이민성 감독은 오는 3일 일본과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결승전에서 만나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서 운명의 한일전을 치르게 된다./KFA
'도쿄 대첩'의 주인공 이민성 감독은 오는 3일 일본과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결승전에서 만나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서 '운명의 한일전'을 치르게 된다./KFA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사람의 인생에는 이상할 정도로 같은 장소, 같은 상대와 다시 만나는 순간이 있다. 그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면 하나의 운명처럼 이어져 있기도 한다.

이민성(53) 감독에게 일본은 그런 존재인지 모른다.

1997년 9월 28일 도쿄 국립경기장. 1998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한일전에서 한국은 후반 막판까지 일본과 1-1로 맞서고 있었다. 후반 41분, 중앙 수비수 이민성이 일본 진영까지 올라가 왼발 중거리슛을 날렸다. 공은 낮고 빠르게 일본 골문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국의 2-1 역전승. 훗날 ‘도쿄대첩’으로 불린 승부의 결승골이었다.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당시 중계석에서 터져 나온 유명한 외침처럼 이민성의 왼발 한 방은 한국 축구사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그리고 정확히 29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는 유니폼을 벗고 벤치에 섰다. 선수 이민성이 아니라 감독 이민성이다. 더구나 마지막 상대가 또 일본이다.

30일 중국과 준결승에서 엄지성의 어시스트로 연속골을 터뜨려 2-1 역전승을 견인한 이영준(아래)과 배준호./KFA
30일 중국과 준결승에서 엄지성의 어시스트로 연속골을 터뜨려 2-1 역전승을 견인한 이영준(아래)과 배준호./KFA

한국은 중국과의 준결승에서 먼저 실점하고도 이영준의 헤더 동점골과 배준호의 역전골로 2-1 승리를 거두며 아시안게임 4회 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이제 10월 3일 일본 아이치현 도요타 스타디움에서 일본을 꺾으면 2014 인천 대회부터 이어진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사상 최초의 4연패를 완성한다.

기막힌 것은 상대다.

한국과 일본은 2018 자카르타·팔렘방 대회 이후 3개 대회 연속 결승에서 만난다. 2018년에는 연장전에서 이승우와 황희찬의 골로 한국이 2-1로 이겼고, 2023년에 열린 항저우 대회 결승에서도 정우영과 조영욱의 골로 2-1 역전승을 거뒀다. 이번에도 일본을 넘는다면 한국은 아시안게임 결승 한일전에서 세 차례 연속 승리라는 진기록까지 세우게 된다.

하지만 과거의 기록이 현재의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번 결승은 이민성 감독에게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무대에 가깝다.

올해 1월 U-23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한국은 지금의 일본 선수들과 상당 부분 겹치는 두 살 어린 일본에 0-1로 졌다. 특히 전반 슈팅 수에서 1-10으로 크게 밀렸다. 일본의 압박과 패스 전개에 고전하며 사실상 ‘반코트 경기’를 허용했다. 후반 들어 반격했지만 끝내 동점골을 만들지 못했다. 이 감독 역시 경기 후 결정력 부족을 패인으로 꼽았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비슷한 물음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선수층은 화려하다. 배준호와 엄지성, 이영준을 비롯해 유럽 무대에서 뛰는 선수들이 공격진 곳곳에 포진해 있다. 그러나 좋은 선수를 많이 보유하는 것과 좋은 팀을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상대가 내려앉았을 때 어떻게 공간을 열 것인지, 선제 실점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흐름을 바꿀 것인지, 경기 도중 전술 변화에 얼마나 기민하게 대응할 것인지를 놓고 이민성호는 대회 내내 평가를 받아왔다.

중국과의 준결승도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전반 22분 먼저 골을 내준 뒤 세트피스로 균형을 맞췄고, 후반 배준호의 역전골로 승리했지만 중국의 밀집수비를 깨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민성호의 좌우 날개를 맡고 있는 배준호(왼쪽)와 엄지성이 중국과 준결승전에서 협력 플레이로 볼을 빼앗고 있다./KFA
이민성호의 좌우 날개를 맡고 있는 배준호(왼쪽)와 엄지성이 중국과 준결승전에서 협력 플레이로 볼을 빼앗고 있다./KFA

결승 상대 일본은 더 까다롭다.

일본은 이번 대회를 사실상 다음 세대를 위한 팀으로 치르고 있다. 그럼에도 결승까지 올라왔다. 준결승에서는 우즈베키스탄에 먼저 실점하고도 후반 막판 동점을 만든 뒤 120분 혈투와 10번째 키커까지 이어진 승부차기 끝에 살아남았다. 연장까지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9-8로 승리했다. 체력 소모는 일본이 훨씬 크지만 벼랑 끝에서 살아난 팀의 자신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이번 결승은 선수들에게만 중요한 경기가 아니다.

이민성 감독에게는 자신의 지도자 경력을 설명할 마지막 90분이 될 가능성이 크다. 2028 LA올림픽 대표팀 지휘봉은 이미 김은중 감독에게 넘어갔다. 아시안게임이 끝나면 이민성 감독의 이번 세대 대표팀 임무도 사실상 마침표를 찍는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전술 논란은 말로 해명하는 것이 아니다. 경기장에서 증명하는 것이다.

1997년의 이민성은 그랬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 수비수가 상대 진영까지 올라가 왼발을 휘둘렀다.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골 하나가 모든 것을 말했다.

29년 뒤의 이민성에게 필요한 것도 어쩌면 같다.

다만 이번에는 직접 공을 찰 수 없다. 언제 압박할 것인지, 일본의 빌드업을 어디에서 끊을 것인지, 배준호와 엄지성의 위치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경기 흐름이 막힐 때 누구를 언제 투입할 것인지로 자신의 축구를 증명해야 한다.

이민성호의 이영준(9번)이 지난달 25일 베트남과 2026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8강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뒤 배준호와 세리머니하고 있다./나고야=KFA
이민성호의 이영준(9번)이 지난달 25일 베트남과 2026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8강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뒤 배준호와 세리머니하고 있다./나고야=KFA

손자병법 모공편(謀攻篇)에는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휘관과 병사가 같은 목표를 향해 뜻을 하나로 모을 때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대회 내내 전술적 아쉬움이 제기됐더라도 한일전이라는 특수성과 4회 연속 우승이라는 역사적 목표 앞에서는 선수단의 심리적 결속을 극대화하는 것이 사령탑의 중요한 임무다.

이민성 감독은 쏟아지는 비판 속에서도 팀을 결승까지 끌어올렸다. 이제 남은 것은 단기전의 본질인 ‘결과’로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는 일이다.

축구에서 감독의 가치는 준비한 전술이 그대로 펼쳐질 때보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결승은 감독에게 두 번째 기회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29년 전 도쿄에서 한 번의 왼발 슛으로 역사를 바꿨던 남자가 이제 벤치에서 다시 일본을 바라본다. 그때는 자신의 발끝에 승부가 달려 있었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선택한 11명의 발끝에 운명이 놓여 있다.

한국 축구의 사상 첫 아시안게임 4연패와 함께 자신의 지도자 경력에도 값진 이정표를 세울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 일본 축구의 성장세를 확인하는 무대에서 아쉬움을 남길 것인가.

상대도 일본이고, 무대도 일본이다.

‘도쿄대첩의 영웅’ 이민성이 29년 만에 맞은 최고의 결자해지 무대다. 이번 결승은 관습적인 한일전의 열기를 넘어 한국 축구의 미래 자원들이 자신감을 축적하는 중요한 이정표이기도 하다.

1997년 일본의 골문을 무너뜨렸던 폭발적인 에너지를 2026년에는 벤치의 리더십으로 재현할 수 있을까.

사상 초유의 아시안게임 4연패를 완성한다면 그는 선수 시절에 이어 감독으로서도 한국 축구의 특별한 한일전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추억이 아니다. 또 하나의 승부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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