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조커’에서 AG 해결사로...엄지성은 왜 이제야 보였나 [박순규의 창]
  • 박순규 기자
  • 입력: 2026.09.16 08:54 / 수정: 2026.09.16 09:19
북중미월드컵의 짧은 출전에도 가능성 증명
15일 카타르전 전반 해트트릭으로 폭발
‘재발견’ 아닌 ‘가치의 재확인’
엄지성이 15일 열린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축구 카타르와의 D조 조별리그 첫경기에서 선제골을 터뜨리고 있다./나고야(일본)=KFA
엄지성이 15일 열린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축구 카타르와의 D조 조별리그 첫경기에서 선제골을 터뜨리고 있다./나고야(일본)=KFA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축구에서 한 선수의 진가는 때로 더 넓은 무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역할과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 선명하게 드러난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첫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폭발시킨 엄지성(24·스완지시티)이 그랬다.

이민성호의 '와일드카드' 엄지성은 15일 일본 나고야 파로마 미즈호 럭비경기장에서 열린 카타르와 남자축구 D조 1차전에서 전반에만 3골을 몰아넣으며 한국의 4-1 대승을 이끌었다. 전반 7분 첫 슈팅으로 골문을 열었고, 20분에는 상대 수비가 걷어낸 공을 놓치지 않았다. 전반 추가시간에는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네 차례 슈팅 가운데 세 번이 골이었다. 폭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침착성과 결정력이 돋보였다.

단순히 상대가 약해서 나온 세 골로 치부하기 어렵다. 첫 골은 공간을 찾아 들어가는 움직임, 두 번째 골은 세컨드 볼을 예측하는 판단, 세 번째 골은 골문 앞에서의 냉정함이 만든 결과였다. 스피드에만 의존하던 측면 공격수가 이제는 공간과 흐름을 읽고 골로 경기를 지배하는 공격수로 성장했음을 보여줬다.

지성은 북중미월드컵에서 체코와 멕시코전에 교체 출전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맞선 경험은 얻었지만, 제한된 출전시간 속에서 자신의 장점을 온전히 펼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손흥민과 이강인 등 쟁쟁한 공격수들 사이에서 맡은 역할도 경기를 주도하는 에이스보다는 흐름을 바꾸는 ‘조커’에 가까웠다.

엄지성이 카타르와의 경기에서 전반에만 세 골을 기록하자 손가락으로 숫자 3을 그려보이고 있다./나고야=KFA
엄지성이 카타르와의 경기에서 전반에만 세 골을 기록하자 손가락으로 숫자 3을 그려보이고 있다./나고야=KFA

아시안게임에서는 달랐다. 이민성 감독은 엄지성에게 와일드카드의 책임과 함께 공격의 중심이라는 권한을 줬다. 엄지성은 그 믿음에 전반 45분 해트트릭으로 답했다. 월드컵에서는 팀의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였지만, 아시안게임에서는 상대가 가장 먼저 막아야 할 ‘첫 번째 카드’가 됐다.

그의 폭발은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 아니다. 광주FC 유스 출신인 엄지성은 2021년 프로에 데뷔해 첫 시즌 37경기에서 4골 1도움을 기록했다. 2022년에는 28경기 9골 1도움으로 광주의 K리그2 우승과 승격을 이끌며 영플레이어상과 베스트11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광주에서 남긴 통산 성적은 108경기 20골 9도움이다. 어린 선수에게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100경기 이상의 실전 경험이 성장의 토양이 됐다.

2024년 스완지시티로 향한 뒤에는 잉글랜드 챔피언십의 거친 압박과 빠른 공수 전환을 견뎌야 했다.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부상과 주전 경쟁을 겪었고, 돌파 이후의 마무리와 몸싸움이라는 과제도 안았다. 그러나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났다. 2026~2027시즌 아시안게임 합류 직전에는 더비 카운티와 왓포드를 상대로 2경기 연속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스완지가 두 경기에서 넣은 5골 가운데 4골에 관여하며 두 경기 연속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카타르전 해트트릭은 이미 달아오른 발끝에서 나온 예고된 폭발이었다.

A대표팀과의 인연도 일찍 시작됐다. 2022년 아이슬란드전에서 A매치 데뷔골을 터뜨렸고, 2025년 파라과이전에서는 약 3년 9개월 만에 다시 골 맛을 봤다. A매치 11경기에서 2골을 기록했다. 대표팀에서 크게 부각되지는 못했지만 기회가 왔을 때 골로 답하는 능력만큼은 꾸준히 증명했다.

따라서 이번 활약은 엄지성의 ‘재발견’이라기보다 ‘재확인’에 가깝다. 우리가 충분히 보지 못했을 뿐, 엄지성은 광주와 스완지에서 차곡차곡 자신의 시간을 쌓아왔다. 맹자는 "하늘이 큰일을 맡기려는 사람에게 먼저 그 마음과 육체를 고단하게 한다"고 했다. 치열한 유럽의 생존 경쟁과 월드컵의 짧은 출전은 엄지성을 단련한 시간이었다.

물론 한 경기의 해트트릭이 모든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한국은 4-0으로 앞선 후반 40분 세트피스에서 집중력을 잃고 실점했다. 더 강한 상대를 만날 토너먼트에서는 한 번의 방심이 탈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엄지성 역시 사우디아라비아전과 8강 이후에도 상대의 집중 견제를 넘어야 진정한 에이스로 평가받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엄지성은 더 이상 ‘빠른 유망주’도, 대표팀의 후반 교체 카드도 아니다. 이제는 스스로 골을 만들고 경기의 방향을 바꾸는 완성형 공격수로 진화하고 있다. 아시안게임 4연패를 향한 이민성호의 길을 연 해트트릭은 한 선수의 성장 선언이기도 했다.

월드컵에서는 짧게 스쳐 지나갔던 엄지성의 시간이 나고야에서 비로소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한국 축구가 카타르전에서 발견한 것은 새로운 얼굴이 아니다. 오래 준비해 온 선수의 진짜 가치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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