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인은 뜨고 구보는 흔들린다...13년 우정의 '생존전' [박순규의 창]
  • 박순규 기자
  • 입력: 2026.09.13 00:00 / 수정: 2026.09.13 00:00
유럽 편견 뚫고 라리가에 선 두 2001년생 천재…이제는 서로가 서로의 기준
14일 2026~27 라리가 5라운드 '맞대결' 예정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새로운 7번 이강인(오른쪽)은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의 절대적 신임 속에 공격의 주축으로 활약하고 있다./더팩트 DB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새로운 7번 이강인(오른쪽)은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의 절대적 신임 속에 공격의 주축으로 활약하고 있다./더팩트 DB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좋은 경쟁자는 때로 좋은 스승보다 낫다. 상대를 쓰러뜨려야 내가 사는 경쟁이 아니라, 상대가 있기에 스스로의 한계를 한 뼘 더 넘어서는 경쟁이라면 더욱 그렇다. 한국의 이강인(25·아틀레티코 마드리드)과 일본의 구보 다케후사(25·레알 소시에다드)가 그렇다.

두 사람은 14일 오전 4시(한국시간)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의 레알레 아레나에서 열리는 2026~2027시즌 스페인 라리가 경기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다. 한국에서는 이강인, 일본에서는 구보를 앞세워 또 하나의 '한일전'으로 바라볼 법하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을 단순한 한일 라이벌전으로만 바라보기에는 두 선수가 걸어온 길에 담긴 이야기가 훨씬 깊다.

이강인과 구보는 나란히 2001년생이다. 키도 173㎝로 같다. 왼발을 주로 사용하고, 낮은 무게중심과 정교한 볼 컨트롤, 좁은 공간에서 상대를 벗겨내는 기술을 무기로 삼았다는 점도 닮았다.

무엇보다 둘은 아시아 축구가 여전히 유럽 축구의 변방으로 취급받던 시절, 어린 나이에 스페인으로 건너가 '기술로 살아남겠다'는 같은 꿈을 꾸었다. 이강인은 10세 때 발렌시아 유스에 들어갔고, 구보 역시 비슷한 나이에 바르셀로나 유스 라 마시아에 몸담았다. 둘은 2013년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대회에서 이미 맞붙었다. 훗날 이강인은 "아주 어릴 때부터 구보와 경쟁했다"고 회상했다.

그 인연은 2021년 마요르카에서 묘하게 이어졌다. 적으로 만났던 두 아시아 소년이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이강인은 구보를 두고 일대일과 슈팅 능력이 뛰어난 선수라며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쟁과 우정이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준 말이었다.

2021년 레알 마요르카에서 이강인과 한솥밥을 먹었던 13년 절친 구보 다케후사의 레알 소시에다드 경기 장면./레알 소시에다드
2021년 레알 마요르카에서 이강인과 한솥밥을 먹었던 '13년 절친' 구보 다케후사의 레알 소시에다드 경기 장면./레알 소시에다드

그리고 5년이 흘렀다.

둘은 더 이상 '아시아에서 온 유망주'가 아니다. 이강인은 발렌시아와 마요르카, 파리 생제르맹(PSG)을 거쳐 이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등번호 7을 달고 있다. 구보 역시 레알 마드리드와 비야레알, 헤타페, 마요르카를 거쳐 레알 소시에다드의 공격을 이끌어왔다.

유럽 진출 자체가 뉴스였던 시대도 지났다. 이제 두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유럽에서 뛰는 아시아 선수'라는 명함이 아니다. 라리가에서 선발 자리를 차지하고,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에서 경쟁하고,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실질적인 경기력이다.

그 점에서 올 시즌 출발은 엇갈린다. 이강인은 아틀레티코 데뷔전이었던 말라가와 라리가 개막전에서 교체 투입 13분 만에 환상적인 왼발 결승골을 터뜨렸다. 이 골은 라리가 사무국의 '8월의 골'로 선정됐다. 세비야 원정에서는 경기 시작 4분 만에 알렉스 바에나의 선제골을 도우며 시즌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당시 패스 성공률은 94%였고 통계업체 풋몹은 평점 8.0을 줬다.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의 신뢰도 눈에 띄게 커졌다. 단순한 마케팅 영입이라는 일부의 선입견과 달리 이강인은 공격수와 미드필더를 넘나들며 아틀레티코 공격 조합의 한 축으로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하지만 박수만 받을 단계는 아니다. 지난 10일 리버풀과의 UCL 리그 페이즈 첫 경기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압박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경험했다. 선발로 나섰지만 슈팅 없이 59분 만에 교체됐다. 특히 전반 40분 리버풀의 동점골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위험한 턴오버를 범했다는 현지의 지적을 받았다. 아틀레티코는 결국 1-2로 역전패했다. 라리가에서 보여준 창의성을 UCL의 속도와 강도 속에서도 구현할 수 있느냐는 숙제가 생겼다.

구보의 시간은 더 절박하다. 올 시즌 초반 4경기에 출전해 3차례 선발로 나섰지만 아직 골도 도움도 없다. 스페인 매체들은 구보가 특유의 일대일 돌파와 파괴력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지난 시즌부터 이어진 부상과 월드컵 참가에 따른 불완전한 프리시즌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설상가상으로 새로운 경쟁자까지 등장했다. 케냐 출신 윙어 좁 오치엥은 엘체전에서 1골 2도움에 관여하며 3-2 승리를 이끌었다. 97분 동안 그라운드를 누비며 경기 MVP로 평가받았다. 펠레그리노 마타라초 감독도 오치엥의 빠른 스피드와 공간 침투, 피지컬 능력을 공개적으로 높이 평가했다.

구보에게 '이름값'이 선발을 보장해주는 시대는 끝났다. 아틀레티코전을 벤치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프로축구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듯 영원한 주전도 없다. 오늘의 주전은 내일의 후보가 될 수 있고, 오늘의 실수는 다음 경기에서 만회해야 한다. 이강인이 구보보다 앞서 있다고 안심할 수도 없고, 구보 역시 몇 경기의 부진으로 그동안 쌓아온 가치를 잃었다고 볼 이유도 없다.

오히려 둘의 현재는 유럽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아시아 선수의 현실을 가장 잘 보여준다. 과거 유럽 축구는 아시아 선수에게 먼저 체력과 스피드를 물었다. 기술 좋은 작은 공격수에게는 더 엄격했다. '유럽의 강한 압박을 견딜 수 있는가', '몸싸움을 버틸 수 있는가'라는 의문표가 늘 따라붙었다.

이강인과 구보는 그 편견을 피해 가지 않았다. 정면으로 통과했다. 유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언어를 배웠고, 경쟁에서 밀려 벤치에도 앉았다. 임대와 이적을 반복했고, 감독이 바뀔 때마다 자신의 가치를 처음부터 다시 증명해야 했다. 이제 두 선수는 세계 최고의 리그 가운데 하나인 라리가에서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테크니션으로 살아남았다.

그래서 14일의 만남은 '한국 대 일본'보다 조금 더 큰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다. 둘은 적이면서 친구다. 친구이면서 경쟁자다. 한 사람이 잘하면 다른 사람도 자극을 받는다. 한쪽의 성공이 다른 쪽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강인의 성공은 구보에게 길이 되고, 구보의 성공은 이강인이 넘어야 할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

13년 전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었던 두 소년은 이제 아틀레티코와 레알 소시에다드의 유니폼을 입고 같은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다. 구보가 선발로 나와 이강인과 직접 맞붙을 수도 있고, 출전 시간이 엇갈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둘이 같은 시간에 그라운드 위에 서느냐가 아니다.

두 사람이 이미 같은 길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 살아남고, 편견을 넘어 주전이 되고, 더 높은 무대로 올라가기 위해 서로를 밀어 올리는 길이다. 진정한 라이벌은 상대의 실패를 기다리지 않는다. 상대가 높이 올라갈수록 자신도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

이강인과 구보의 경쟁이 아름다운 이유다. 한일전이라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한계를 넓혀주는 친구이자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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