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올 시즌 K리그에서 축구 좀 안다는 사람들의 가장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는 팀은 단연 강원 FC다. 피치 위를 수놓는 역동성과 짜임새를 보며 많은 이들이 유럽 최첨단 전술의 아이콘인 위르겐 클롭의 ‘게겐프레싱’이나 펩 과르디올라의 ‘포지셔널 플레이’를 앞다투어 대입하느라 바쁘다.
사실 지난해까지 K리그를 가장 뜨겁게 달군 전술적 키워드는 광주 FC의 ‘정효볼’이었다. 촘촘한 포지셔널 플레이와 파격적인 공간 해석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이정효 감독의 등장은, K리그를 단순히 몸으로 부딪치는 무대가 아닌 고도의 지략 대결의 장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올 시즌, 그 전술적 바통은 강원의 ‘경호볼’로 이어지고 있다. 비록 전반기 압도적인 1위에 있거나 화려한 자본을 가진 빅클럽은 아닐지라도, 지금 K리그에서 가장 눈을 뗄 수 없는 ‘핫 클럽’은 단연 강원이다. 한국형 전술가형 지도자들의 연쇄 탄생은 리그 전체의 체급을 살찌우고 있다는 평가다.
◆ 10년의 인고가 빚어낸 ‘창조적 모방’
정경호 감독의 지휘봉 아래 펼쳐지는 강원의 축구는 최근 거의 매 경기 상대를 전술적으로 압도했다. 이 파괴력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 감독은 대전 시티즌 시절 부상으로 다소 이른 나이인 32세에 선수 생활을 은퇴한 뒤 2014년 울산대 코치를 시작으로 상주 상무, 성남 FC, 그리고 강원 FC까지 약 10년여의 코치 및 수석코치 기간을 거치며 현장에서 독하게 전술을 공부했다.
특히 유럽 축구 트렌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며 세계적인 지도자들의 경기 모델을 해체·연구했다. 클롭, 과르디올라, 아르테타를 비롯해 안제 포스테코글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장들의 장점만을 흡수해 K리그 스타일에 맞게 변형하는 ‘창조적 모방’의 노하우를 쌓았다. 세계 축구의 트렌드를 공부하며 갖게 된 "선수 개인 능력에 전술을 입혀야 한다"는 그의 확신은, 오랜 인고 끝에 현재 강원의 탄탄한 뼈대로 완성됐다.

◆ 피치 위에 구현된 기하학과 ‘정교한 헤비메탈’
그 오랜 공부의 결과물이 바로 지금 강원이 보여주는 '정교한 헤비메탈 축구'다. 최근 강원의 경기를 보면 단순히 몸을 던져 공을 뺏는 1차원적 육탄전에 그치지 않는다. 정 감독은 필자와 인터뷰에서 "우리는 확실히 하이 압박이다. 상대 지역 앞에서부터 싸우고 뺏자마자 숏카운터로 들어간다"고 직접 명시했다.
전방에서 상대를 강하게 부수고 들어가는 강력한 에너지 레벨은 위르겐 클롭이 대명사처럼 썼던 '헤비메탈 축구'의 성격이 짙다. 특히 시즌 초반 3무 2패의 침체를 겪자, 기존의 후방 빌드업에 집착하는 대신 공수 순서를 과감히 바꾼 유연한 피드백은 전술가로서 정 감독의 역량을 보여준 백미였다.
하지만 강원의 진짜 무서움은 이 거친 압박이 '철저한 계산' 위에서 움직인다는 점에 있다. 정 감독은 매 라운드 상대의 빌드업 형태나 선수의 성향에 맞춰 디테일한 압박 전략을 설계한다. 강원만의 명확한 '압박 시퀀스'가 존재하고, 선수들이 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움직이기에 가능한 축구다. 무작정 덤벼드는 압박이 아니라 상대의 패스 길을 길목마다 차단하는 구조적 압박이 가해지다 보니, 상대는 쉽게 강원의 진영으로 넘어오지 못한 채 질식하고 만다.
이 철저한 통제 속에서 볼을 탈취한 긴박한 찰나, 강원 선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볼을 소유한 동료를 중심으로 기하학적인 ‘사각형 대형’을 형성한다. 굳이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내 대각선 양쪽에 동료가 존재한다는 전술적 신뢰가 깔려 있다.
정 감독은 상황 인식 훈련과 게임 모델에 입각한 패스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선수들에게 이 공간 감각을 주입했다. 공간을 격자로 쪼개어 수적 우위를 점하는 이 기하학적인 정교함은, 현재 전 세계가 찬사를 보내는 일본 국가대표팀의 세련된 구조적 빌드업 체계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 물 흐르는 전개의 핵심, 패스의 ‘길이와 속도’
강원 축구가 지닌 또 다른 백미는 단연 그라운드를 낮게 가르는 패스의 ‘질’이다. 패스의 길이와 속도가 마치 자로 잰 듯 정확하고 정교하다. 볼을 소유한 선수가 사각형 대형의 이점을 살려 원 터치, 투 터치로 공을 밀어줄 때, 패스의 세기는 동료가 다음 동작을 가장 빠르고 편하게 이어갈 수 있도록 완벽하게 제어되어 있다.
너무 길어서 끊기거나 너무 느려서 상대의 압박 타이밍을 허용하는 법이 별로 없다. 이 정교한 패스 워크가 팀 전체의 유기적인 움직임과 결합하면서, 상대 수비 블록은 순식간에 해체되고 경기장 전체에는 말 그대로 ‘물 흐르는 듯한’ 주도적 전개가 완성된다.

◆ 스타의 발끝이 아닌 ‘시스템’의 힘, 국가대표팀에 던지는 화두
이처럼 철저하게 준비된 젊은 지도자가 명확한 디테일로 리그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것을 확인할수록, 현재 월드컵 본선을 준비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깊은 한숨과 아쉬움만 더 짙어진다. 역대 최고 수준의 화려한 해외파 라인업과 체급을 자랑하지만, 피치 위에서 정작 시스템의 힘이 완전히 증발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표팀은 약속된 패턴 플레이로 공간을 쪼개기보다 스타 플레이어들의 개인 기량과 센스에 공격 전개를 전적으로 의존한다. 전술적 철학과 세부 지침이 보이지 않는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과거의 권위나 명확한 실체가 없는 ‘형님 리더십’의 답답함뿐이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정립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선수들에게 심플하면서도 명확한 피드백을 주며 확신을 심어주는 정경호 감독의 리더십은, 그래서 현재 방향타를 잃고 표류하는 홍명보호가 가장 뼈아프게 복기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 강원 돌풍이 K리그에 남긴 진짜 가치
그렇기에 올 시즌 강원 FC가 K리그 무대에서 보여주는 돌풍은 단순한 ‘언더독의 반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특정 스타의 발끝이 아닌 구조와 시스템의 힘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축구가 가능한지 몸소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경호 감독은 "그냥 우리가 하는 색깔, 그리고 강원이 가져가야 되는 철학과 방향성에만 신경 쓰려 한다.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렇게 제 나름대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때 K리그 자체의 수준도 함께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덤덤히 지향점을 밝혔다.
‘정효볼’이 쏘아 올린 전술적 화두가 ‘경호볼’이라는 더 세련된 시스템으로 진화했듯, 스타 플레이어 개인의 이름값이 아닌 구조의 힘으로 주도하는 축구는 이제 K리그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전술적 가치와 명확한 리더십으로 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는 강원 FC. 하지만 이는 비단 강원만의 고독한 질주가 아니다. 강원이 쏘아 올린 전술적 미학은 올 시즌 K리그 무대 곳곳에서 저마다의 색깔로 피어나는 전술의 향연과 맞물려 있다.
각 팀의 지략가들이 피치 위에서 펼쳐내는 치열한 수 싸움과 ‘전술적 스펙트럼’이야말로 K리그 전체를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고 역동적으로 살찌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