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신간] '항복의 역사' 정묘호란…패자의 기록 속에 새겨진 진실
  • 이병욱 기자
  • 입력: 2026.04.16 09:00 / 수정: 2026.04.16 09:00
장편 역사소설 '항복하지 않은 성-의병장 정봉수' 출간 
역사적 공백 메우며 민초들의 싸움 입체적으로 재구성
항복하지 않은 성-의병장 정봉수. 이광희 지음. 출판사 청어. 600쪽. /출판사 청어
'항복하지 않은 성-의병장 정봉수'. 이광희 지음. 출판사 청어. 600쪽. /출판사 청어

[더팩트ㅣ이병욱 기자]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말한다. 하지만 때로는 패자의 기록 속에 진실이 숨어 있기도 하다.

조선 중기 정묘호란(1627년)은 '항복의 역사'로 기록돼 있다. 후금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조선의 조정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왕(인조)은 강화도로 몸을 피했다. 전쟁은 결국 굴욕적인 화의를 맺으며 항복으로 끝나고, '치욕'을 역사에 새겼다.

그런데 '전쟁의 결과만으로 과연 승리와 패배를 단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역사소설이 출간됐다.

소설가 이광희가 정묘호란을 배경으로 한 장편 역사소설 '항복하지 않은 성-의병장 정봉수'(출판사 청어)를 내놨다.

'항복하지 않은 성'은 승자가 아닌 패자의 기록 속에서 전쟁의 진실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민초들의 삶을 복원한다.

그동안 역사책에서는 정묘호란이란 시공간에서 잘 불리지 않았던 장소와 인물이 있다. 무너지지 않았던 '용골산성', 그리고 끝내 물러서지 않았던 민초들과 의병장 정봉수다.

소설의 서사는 정묘호란의 전개와 함께 긴장감을 더해간다. 후금의 대군이 몰려오고, 주변 성들이 차례로 함락되는 가운데, 용골산성은 고립된 채 버텨야 했다. 수차례의 공격과 기습, 그리고 생존을 위한 처절한 선택이 이어지면서 성 안의 시간은 점점 압축된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았던 이 성도 결국 외부의 힘이 아닌 내부의 명령으로 비워지게 된다. 조정의 항복 맹약을 지키기 위한 어명은 끝까지 버텨온 성마저 내려놓게 만든다.

정봉수는 성 안의 공동체를 이끄는 중심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전통적인 영웅 서사의 주인공과 결이 다르다. 권력이나 혈통이 아닌, 상황 속에서 선택하고 책임지는 인간이다.

낙후된 산성을 방어 거점으로 탈바꿈시키고, 전투 경험이 없는 백성들을 훈련시켜 군대로 만드는 과정은 단순한 전략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신뢰를 쌓고, 서로를 믿게 만드는 과정이다. 이를 완성한 정봉수의 리더십은 명령이 아닌 '결속'에서 비롯됐다.

'항복하지 않은 성'은 그저 전쟁의 승패를 기록한 역사소설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남고 싸운 사람들의 내면을 복원하고 있다. 피난길에서 흩어진 백성들, 가족을 잃고 성으로 모여든 사람들, 농기구를 내려놓고 칼을 든 이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이 소설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작가는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를 토대로, 전란 속에서도 성을 끝까지 지켜낸 정봉수와 민초들의 싸움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했다. 단순한 전투 기록을 넘어 피난민과 백성들이 어떻게 군사로 조직되고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세밀하게 그려냈다.

독자는 책장을 넘길수록 '국가(나라)'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조정이 항복을 선택하고 왕이 도성을 떠난 순간에도 용골산성은 그 자리에 있었고, 그 안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국가가 유지됐다. 성(나라)을 지키는 것은 왕이나 영토가 아니라 결국 백성이며,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제도가 아닌 '의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항복하지 않은 성'은 역사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병자호란이 '삼전도의 굴욕'으로 널리 알려진 데 비해, 정묘호란은 상대적으로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전쟁 역시 조선 사회에 깊은 균열을 남긴 사건이었다. 작가는 이 공백에 주목하고, 사료와 기록을 바탕으로 그 틈을 서사로 채워 넣었다.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기억의 방향을 바꾸는 고된 작업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추천사를 통해 "이 작품은 한 장수의 항전을 넘어 민족의 자존을 일깨운다"며 "국가의 힘은 결국 국민의 용기와 신념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항복하지 않은 성'은 한 개인의 영웅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선택과 의지를 통해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묻고 있다.

작가 이광희의 문학은 오랫동안 역사 속 민초들의 삶을 중심에 두어 왔다. 그의 작품에서 역사는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견디고 살아낸 사람들의 시간이다. 이번 작품 역시 그러한 시선 위에서 완성됐다. 지배층이 무너진 자리에서 끝까지 남은 것은 이름 없는 이들의 의지였고, 그 의지를 하나로 모아낸 정봉수라는 인물이 있다.

'항복하지 않은 성'은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로 끌어오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위기의 순간,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400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도 유효하다.

200자 원고지 2500매 정도의 양을 600쪽으로 구성한 이 소설은 2027년 정묘호란 400주년을 앞두고, 단순한 기념을 넘어 새로운 해석의 계기를 제공한다.

작가 이광희는 경북 상주 출신으로 현재 대전에 거주하고 있다. 1997년 소설가 구인환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장편소설로는 '붉은 새'(상·하), '청동물고기'(1·2·3), '소산등', '진시황과 여', '대호지 아리랑', '시계소년', '아이', '항복하지 않은 성' 등이 있다. 현재 한국소설가협회와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wookle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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