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스포츠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드라마 중에서도 ‘친정팀의 심장에 꽂는 비수’만큼 흥미롭고 잔인한 서사가 또 있을까. ‘하나은행 K리그1 2026’ 7라운드가 열린 2026년 4월 11일, 3만 4천여 명의 관중이 운집한 상암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이 완벽한 서사가 완성되는 무대였다. 어제의 ‘천적’이 오늘의 ‘은인’이 되어 9년 묵은 안방 징크스를 산산조각 냈다. 그 중심에는 ‘완벽한 조연’으로 빛난 송민규가 있었다.
FC서울 팬들에게 전북 현대는 오랜 기간 거대한 벽과 같았다. 무려 9년이다. 2017년 7월 이후 서울은 안방에서 전북을 13번 불러들여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2무 11패). 단순한 전력 차를 넘어선, 일종의 심리적인 ‘포비아(공포증)’에 가까웠다. 김기동 감독조차 "상위권 강팀을 넘어서야 우승으로 갈 수 있다"며 전북전 승리의 중요성을 역설했을 정도다.
이 무거운 징크스를 깨기 위해 김기동 감독이 꺼내든 카드는 다름 아닌 ‘심리전’이었다. 타깃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전북에서 서울로 적을 옮긴 송민규. 그는 지난 시즌 전북 유니폼을 입고 터뜨린 5골 중 무려 4골을 서울의 골망에 꽂아 넣었던 명실상부한 ‘서울 킬러’였다. 김 감독은 경기를 앞두고 그에게 딱 한 마디를 던졌다. "작년에는 서울 상대로만 골을 넣었으니, 이제는 전북 상대로만 해보자."

세계 축구사를 돌아봐도 친정팀을 무너뜨리는 옛 선수의 활약은 언제나 최고의 명장면을 탄생시켜 왔다. 2014년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첼시의 영원한 레전드인 프랭크 램파드가 맨체스터 시티 유니폼을 입고 교체 투입되어 친정팀 첼시의 골망을 가르는 85분 동점골을 터뜨렸을 때의 충격, 혹은 2003-04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에서 쫓겨나듯 임대를 떠났던 페르난도 모리엔테스가 AS모나코 소속으로 레알을 무너뜨리는 맹활약을 펼치며 탈락의 철퇴를 내렸던 순간들이 그러하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옛 동료들의 빈틈을 파고들어 치명상을 입히는 전개는 언제나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날 상암벌에서 송민규가 쓴 드라마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0-0의 팽팽한 균형이 이어지며 모두가 또 한 번의 무승부를 예감하던 후반 추가시간 4분. 극적인 기적을 알리는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송민규의 발끝이었다.
서울의 마지막 역습 찬스, 중앙에서 공을 잡은 송민규는 특유의 저돌적인 드리블로 전북 수비진에 균열을 낸 뒤 오른쪽 측면으로 침투하는 문선민에게 절묘한 패스를 찔러 넣었다. 꽉 막혀있던 혈을 뚫어준 이 결정적 기점을 시작으로, 문선민과 야잔을 거쳐 클리말라의 극적인 논스톱 슛으로 골망이 흔들리기까지 군더더기 없는 전개가 이어졌다. 직접 골을 넣은 것은 아니었지만, 친정팀의 수비진을 허물고 94분 극장골의 시발점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송민규는 단연 이날 최고의 씬스틸러였다.
이날의 1-0 신승은 단순한 승점 3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지독했던 9년의 안방 전북 징크스를 마침내 털어냈고, 개막 이후 6경기 연속 무패(5승 1무, 승점 16)를 질주하며 2위 전북과의 격차를 5점으로 벌린 채 단독 선두를 굳건히 했다.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위닝 멘탈리티가 서울 선수단 전체에 확실히 이식되었음을 증명한 경기였다.
당장 3일 뒤인 15일, 얇은 선수단 뎁스를 안고 험난한 울산 원정을 떠나야 하는 서울이다. 하지만 지금의 서울이라면 그 어떤 강팀을 만나도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든든함이 생겼다. 친정팀을 울린 송민규의 투지, 어제의 킬러를 오늘의 조력자로 탈바꿈시킨 김기동 감독의 용병술, 그리고 94분까지 포기하지 않은 선수들의 집념. 바야흐로 상암벌에 진정한 ‘서울의 봄’이 활짝 피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