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 '대통령부터 걸그룹까지', 시구자를 보면 시대가 보인다
  • 신명철 기자
  • 입력: 2013.03.30 09:00 / 수정: 2014.07.23 18:17


1982년 3월 27일, 토요일 오후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은 야구가 이 땅에 들어온 지 80여년 만에 출범하는 프로 리그에 대한 기대감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2만 명이 넘는 관중은 삼성 라이온즈-MBC 청룡의 프로 야구 원년 개막전 관련 행사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경기 개시 시간을 5분여 앞두고 전두환 대통령이 마운드에 올랐다. 일순간 ‘성동 원두(城東 原頭)’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성동 원두는 야구 올드 팬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의 별칭이다. 한자어 그대로 성동 지역에 있는 들판이란 뜻이다.

당시 관련 사진을 보면 상의를 벗은 전 대통령 오른쪽 뒤에 서종철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총재가 있고 오른쪽 옆으로 경호원이 있다. 또 다른 사진들을 보면 전 대통령 주변에 6개 구단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마운드 주변에 줄지어 서 있는데 이들 역시 경호원이다. 마운드 주위에만 경호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날 글쓴이는 백스톱 뒤에 있는 기자실에 있었는데 시구를 마친 전 대통령이 경기장을 떠난 뒤 바뀐 스탠드를 지금도 기억한다. 예전에 쌀가게에서는 쌀을 됫박이나 말박에 담아 팔았는데 가게 주인이 양을 많이 준다며 두어 번 흔들면 박에 담긴 쌀이 제법 가라앉곤 했다. 딱 그런 모양이었다. 전 대통령이 시구를 마치고 2, 3회인가까지 경기를 보고 나간 뒤 동대문운동장 야구장 스탠드는 일시에 푹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바뀌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는 삼척동자도 알 터이다.

아무튼 그날 이후 개막전에서 대통령이 시구한 사례는 1995년 4월 15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삼성-LG 트윈스전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한 게 유일하다. 야구를 좋아하는 김 대통령은 1994년 태평양 돌핀스-LG의 한국시리즈 1차전, 1995년 롯데 자이언츠-OB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7월 17일 대전구장에서 벌어진 올스타전 시구를 했다. 당시 사진에도 경호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다. 2루심이 경기용 공 주머니를 차고 있었던 것이다. 주심이 차야 할 공 주머니를 2루심이 차고 있다니. ‘매의 눈’을 가진 관중에게는 딱 걸렸을 것이다. 2루심의 공 주머니에는 경호를 위한 '특수 장비'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주심의 공 주머니에는 보통 9, 10개의 공을 담는데 많게는 11개까지 넣을 수 있다. 공 하나의 무게가 140g을 넘으니까 1.5kg 가까이 담을 수 있는 비교적 큰 주머니다. 어떤 ‘특수 장비’였는지 군대에 다녀온 남성이라면 대충 짐작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시구를 하면 그라운드에 나가지 않고 스탠드에서 한다. 국내에서도 같은 사례가 있다. 1958년 10월 21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이때는 경기장 이름이 동대문운동장이 아니었다)에서는 메이저리그 세인트 루이스 카디널스와 사실상 국가 대표인 전(全)서울군(軍)의 경기가 열렸다. 일본 원정에 나섰던 세인트 루이스가 한 신문사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것이었다. 당시 세인트 루이스는 스탠 뮤지얼 등 주전 선수 대부분이 아시아 원정에 나섰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본부석 스탠드에서 그라운드에 있는 전서울군 포수 김영조에게 공을 던졌다. 시구를 위해 백스톱 일부를 찢어 구멍을 내고 그 사이로 던졌다.

이 경기에 나선 전서울군 선수 가운데 박현식(삼미 슈퍼 스타즈) 성기영(롯데) 김진영(청보 핀토스)은 뒷날 프로 야구단 감독으로 활약하게 된다.

역대 프로 야구 개막전 시구자를 살펴보면 시대의 흐름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는데 시구를 한 체육 분야 주무 부처의 장관 직함을 보면 한국 스포츠의 위상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 흥미롭다. 1983년 이원경 '체육부' 장관, 1989년 김집 ‘체육부’ 장관, 1990년 정동성 ‘체육부’ 장관, 1991년 박철언 '체육청소년부' 장관, 1992년 이진삼 ‘체육청소년부’ 장관, 1994년 이민섭 '문화체육부' 장관, 1997년 송태호 ‘문화체육부’ 장관, 1998년과 1999년 신낙균 '문화관광부' 장관, 2000년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 2001년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2008년과 2009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이다. 체육부에서 체육청소년부로 몸집을 불렸다가 ‘체육’이 빠지는 수난을 겪더니 이제는 문화와 관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다.

2010년 3월 27일 부산 사직 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롯데의 개막전에서 걸 그룹 포미닛의 현아가 시구자로 나선 건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더팩트 편집위원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이메일: jebo@tf.co.kr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