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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인 40대 축구 선수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호마리우, 미우라, 셰링엄, 히바우두, 말디니, 김병지, 코스타쿠르타, 밀라. |
1. 빌리 메레디스(1874.06.30, 1924년 은퇴/1958년 사망)
- 웨일스 출신의 '맨체스터 맨' 윌리엄 헨리 '빌리' 메레디스는 '원조 40대 축구 선수'라 할 수 있다. 1890년 커크에서 프로에 데뷔한 그는 1894년 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로 이적해 전성기를 누렸다. 맨시티에서 8시즌 동안 300경기 이상을 소화하면서 120번 넘게 상대 골네트를 갈랐다. 당시 포지션 개념이 정확하게 잡혀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아웃사이드 포워드'로 불리면서 우측면과 중앙 공격을 두루 수행했다. 지금으로 본다면 우측 윙포워드쯤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데, 가공할만한 득점력을 갖춘 날개자원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1898~1899시즌에는 34경기에서 30골을 터뜨리면서 '원샷원킬'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1906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로 둥지를 옮긴 메레디스는 마흔을 훌쩍 넘어서도 계속해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다. 40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경기 출전 기회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만 46세를 넘긴 1920~1921시즌에 득점에 성공할 정도로 '40대 파워'를 자랑했다. 이듬해 친정팀인 맨시티로 다시 돌아간 뒤 세 시즌을 더 뛰고 은퇴를 선언했다. 49세 245일의 나이에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FA컵 경기에 출전할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다. 메리디스는 웨일스 대표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48경기에 나서 11골을 터뜨리면서 공격첨병 역할을 했다. 그는 1958년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2. 테디 셰링엄(1966.04.22, 2008년 은퇴)
- 셰링엄은 1990년대 토트넘 홋스퍼와 맨유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유명골잡이다. 1983년 밀월에 입단해 프로에 데뷔했고, 현재의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한 1992~1993시즌에 토트넘 소속으로 21골을 터뜨리며 첫 득점왕에 올랐다. 1999년에는 맨유 소속으로 대형사고를 터뜨렸는데, 그 유명한 '누 캄프의 기적'의 주인공이다.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전에서 교체로 출전해 0-1로 뒤지던 후반 추가시간에 동점골을 작렬했고, 이어 곧바로 올레 군나르 숄샤르 역전골까지 어시스트했다. 그 해 잉글랜드 FA컵 결승전에서도 1골 1도움을 올렸으니, '결승전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는 게 당연했다. 셰링엄은 잉글랜드 대표팀으로서도 51경기에서 나서 11골을 터뜨렸는데, 30대 중반의 나이에 2002한일월드컵 본선에 나서 '조커'로 좋은 역할을 펼쳤다. 셰링엄은 마흔을 바라보던 2004~2005시즌에 챔피언십에 있던 소속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를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고, 2007~2008시즌 챔피언십 콜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42살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현재 그의 아들인 찰리 셰링엄(1988년생)이 본머스의 스트라이커로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3. 호마리우(1966.01.29, 2008년 은퇴)
- 1994미국월드컵에서 조국 브라질에 4번째 월드컵 우승을 안긴 호마리우도 40대까지 현역으로 뛰었다. 1985년 바스쿠 다 가마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호마리우는 1988년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PSV 에인트호벤에 둥지를 틀며 유럽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등을 거쳤고, 알 사드와 마이애미 FC,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에서도 활약하면서 남미, 유럽, 아시아, 북중미, 오세아니아에서 모두 활약한 선수로도 유명하다. '가장 쉽게 골을 넣는 선수'로 평가 받았던 호마리우는 1986년 바스쿠 다 가마에서 약관의 나이에 득점왕에 올랐고, 에인트호벤 시절 3시즌 연속 득점왕, 바르셀로나에서도 피치치(스페인 프리메리라가 득점왕)가 되면서 최고의 골잡이로 우뚝 섰다. 2005년 마흔을 앞둔 시점에서 친정팀 바스쿠 다 가마로 돌아왔는데, 만 39세의 나이에 득점왕에 오르면서 건재를 과시했다. 그리고 이듬해 미국 마이애미로 이적해 만 40세에 다시 득점왕에 등극했다. 2008년 공식 은퇴를 선언한 호마리우는 공식 경기에서 1000골 이상을 기록했다고 주장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브라질 대표로서는 총 70경기에 출전해서 55골을 터뜨렸는데, 이 기록은 펠레(77골)와 호나우두(62골)에 이어 3위에 랭크되어 있다.
4. 파올로 말디니(1968.06.26, 2009년 은퇴)
- AC 밀란과 이탈리아의 레전드 말디니도 40대에 그라운드를 당당하게 누볐던 선수다. 레프트백과 중앙수비수를 두루 소화할 수 있었던 그는 모든 부분에서 수준급 기량을 선보이면서 철벽수비의 대명사로 통했다. 1985년부터 2009년까지 오로지 AC 밀란에서만 선수 생활을 하면서 '영원한 밀란맨'으로 통하는 사나이다. 리그 647경기에 나서 세리에 A 최다경기 출전 기록을 보유하고 있고, 컵대회와 유럽 클럽대항전까지 모두 합치면 밀란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가 총 902경기에 달한다. 당연히 이 역시 이탈리아 선수 최다 기록이다. '별들의 전쟁' UEFA 챔피언스리그 139경기 출전 기록도 역대 3위에 올라 있다. 1988년부터 아주리 군단의 부름을 받은 말디니는 2002년까지 A매치 126경기에 출전해 센추리 클럽에도 가입되어 있다. 2009년 은퇴 시점에서 충분히 더 뛸 수 있다는 여론이 들끓었지만, 무리하지 않고 명예로운 은퇴를 선택했다.
5.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1966.04.24, 2007년 은퇴)
- 또 다른 '밀란맨' 코스타쿠르타도 백전노장으로 맹위를 떨쳤다. 1986년 AC 밀란에 입단한 그는 2007년까지 밀란에서 활약했다. 신인 시절 잠시 몬자에 임대되어 뛰기도 했으나 경험을 쌓은 뒤에는 쭉 밀란의 수비라인에 섰다. 신체조건(182cm)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는 영리함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기복 없는 활약을 펼치며 최고의 수비수로 꼽혔다. 이름값에서는 말디니에 뒤질지 몰라도, 꾸준함과 열정에서는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정도였다. 수비라인 조율 능력에 태클 능력 및 대인방어 능력을 두루 갖추고 있었고, 상대의 패스 줄기를 차단하는 컷팅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덕분에 밀란은 1980~1990년대 수비 철옹성을 구축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21세 대표를 거쳐 1991년 A팀에 발탁된 코스타쿠르타는 1998년까지 59경기의 국가대항전에 출전했고, 1994미국월드컵과 1998프랑스월드컵, 그리고 유로 1996에서 카테나치오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6. 로저 밀라(1952.05.20, 1997년 은퇴)
- 카메룬을 넘어 아프리카의 축구 영웅이다. 1990이탈리아월드컵에서 38세의 나이에 카메룬의 최전방에 선 밀라는 4골을 터뜨리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루마니아와 조별예선 2차전에서 2골을 터뜨리면서 스타 탄생을 알린 그는 콜롬비아와 16강전에서도 2골을 몰아치면서 카메룬의 돌풍을 태풍으로 바꿔놓았다. 사실, 밀라는 1987년 국가대표에서 은퇴했었다. 1990이탈리아월드컵을 앞두고 국민적인 성원을 못 이겨 대표팀에 복귀했고, 결국 아프리카 첫 8강 진출이라는 신화의 주역이 되면서 영웅으로 떠올랐다. 밀라는 마흔이 넘어서도 월드컵에 참가했다. 1994미국월드컵에 출전해 골까지 기록했다. 러시아와 조별예선 경기에서 42세 39일의 나이에 골을 터뜨리면서 월드컵 역대 최고령 득점 기록을 갖게 됐다. 102경기 28골. 미국월드컵 이후 은퇴한 밀라의 A매치 최종 기록이다. 카메룬 대표 선수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밀라지만,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이미 프랑스 무대에서 날리는 공격수로 통했다. 1977년 발랑시엔에 입단해 AS 모나코, 바스티아, 생테티엔, 몽펠리에 등에서 10여 년 동안 좋은 활약을 펼쳤다. 40대에 접어 든 밀라는 카메룬 리그와 인도네시아 리그 등에서 활약을 펼치다 1997년 만 45세의 나이에 명예롭게 은퇴를 선언했다.
7. 아메데오 카르보니(1965.04.06, 2006년 은퇴)
- 발렌시아의 스포팅 디렉터로 유명했던 카르보니도 40세 넘어서까지 선수 생활을 했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레프트백 포지션을 담당했던 카르보니는 1984년 아레초에 입단하면서 프로 선수가 됐다. 이후 AS 바리, 엠폴리, 파르마, 삼프도리아에서 활약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20대 중반에 접어들던 1990년 명문 AS 로마로 이적해 7시즌 동안 로마의 좌측을 지키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어느덧 30대 노장이 된 카르보니는 스페인으로 떠나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박쥐 군단' 발렌시아에 입단해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쳐 보였다. 1997~1998시즌부터 붙박이 주전으로 나서며 발렌시아 수비의 핵심 역할을 잘 해냈다. 30대 후반에도 성실한 플레이로 후배들을 잘 이끌었고, 만 40세가 되던 2004~2005시즌에도 당당히 주전으로 뛰었다. 2001년 발렌시아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의 주역이었고, 2004년 UEFA컵 우승에 일조하며 유럽 클럽대항전 최고령 우승자로 등록됐다. 2005년 10월에는 만 40세 6개월 17일의 나이로 프리메라리가 경기에 나서면서 리그 최고령 출전 신기록을 세웠다. 카르보니는 아주리군단의 일원으로도 활약했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총 18경기에 나선 바 있다. 2005~2006시즌의 끝 무렵에 발렌시아의 스포팅 디렉터로 활약했고, 현재 인테르 밀란의 기술 고문직을 맡고 있다.
8. 개리 스피드(1969.09.08, 은퇴)
- 40대 감독 겸 선수의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스피드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잉글랜드 무대에서 꽤 날렸던 선수다. 1988년 리즈 유나이티드에 입단해 8시즌을 소화했는데, 19세에 프로에 데뷔해 오랫동안 2부리그에서 활약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실력을 검증 받은 그는 1996년 에버턴으로 이적해 준수한 활약을 보이면서 프리미어리그 톱 클래스 미드필더로 평가를 받았고, 1998년 뉴캐슬로 둥지를 옮겨 6년 동안 200경기 이상을 소화하면서 베테랑의 반열에 올라섰다. 30대 중반인 2004년 볼턴으로 이적한 스피드는 2006년 프리미어리그 첫 500경기 출전이라는 대업을 이뤘고, 2008년 챔피언십에 속해 있는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적을 옮겼다. 2009년 만 40세의 나이를 넘어서도 현역으로 활약한 스피드는 2010년 은퇴를 발표한 뒤 셰필드의 지휘봉을 잡고 새롭게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런데 선수층이 얇았던 탓일까. 아니면 아직까지 현역 생활에 미련이 남은 것일까. 스피드는 2011년 8월 하틀풀과의 칼링컵 경기에서 후보 명단에 포함되어 눈길을 끌었다. 비록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감독 겸 선수로 화제를 모았다. 웨일스 출신인 1990년부터 2004년까지 대표팀의 주축으로 85경기에 출전해 7골을 기록했던 스피드는 2011년 11월 27일 사망했다.
9. 히바우두(1972.04.19, 현역)
- 브라질 출신의 '왼발의 마법사' 히바우두가 녹슬지 않은 기량으로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1991년 산타 쿠르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는 코린티안스, 팔메이라스 등을 거친 뒤 1996년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로 이적하면서 스페인 무대를 밟았다. 적응 기간을 거칠 것도 없이 스페인 데뷔 시즌에 41경기 21골의 놀라운 기록을 만들어낸 그는 이듬해 바르셀로나로 이적해 '슈퍼스타'의 탄생을 알렸다. 바르셀로나에서 믿기 힘든 '왼발 마법'으로 팬들을 열광시켰던 그는 2002년 AC 밀란으로 둥지를 옮겼고, 이후 올림피아코스, AEK, 카부스코프(앙골라) 등을 거친 뒤 올 시즌 상 카에타누로 이적했다. 최근 복귀전에서 멋진 골을 터뜨리면서 건재를 과시했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던 히바우두는 A매치 74경기에서 34골을 기록했다. 1998프랑스월드컵 준우승과 2002한일월드컵 우승에 큰 공을 세우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각광을 받았다.
10. 미우라 가즈요시(1967.02.26, 현역)
- 일본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1990년대 일본축구의 놀라운 발전에 앞장 선 인물이 바로 미우라다. 브라질 유학파인 미우라는 산투스와 팔메이라스 등을 거쳐 J리그 출범을 앞두고 일본에 돌아왔다. 1993년과 1994년 베르디 가와사키 소속으로 맹활약을 펼치면서 일본 최고의 스타로 급부상했다. 이후 미우라는 이탈리아 세리에 A 제노아와 크로아티아 리그 디나모 자그레브, 호주 A리그 시드니 FC 등에서 활약하면서 노장파워를 과시했다. 그리고 마흔을 바라보던 2006년 J2 리그 요코하마 FC로 돌아왔고, 만 45세인 현재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다. 전성기 시절보다 기량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후배들을 독려하면서 즐거운 표정으로 볼을 차고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일본 프로축구 최고령 득점 기록을 계속 갈아치워온 그는 2012년 5월 골을 잡아내면서 '45세 3개월 1일'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또한, 일본 풋살리그의 에스폴라다에 임대돼 활약하기도 했다. 미우라는 일본 대표로서 89번의 A매치에 나서 55골을 터뜨렸다. 일본 A매치 최다골의 주인공이지만 월드컵과는 인연을 맺지 못한 비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55골 가운데 북한전 3골 대한민국전 3골을 기록했기 때문에 '한국 킬러'로 통하기도 했다.
11. 김병지(1970.04.08, 현역)
- 수 년 전부터 개인적인 목표를 묻는 질문에 그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40살 이상까지 선수로 뛰고 싶다." 그는 그 약속을 지켰고, 지금도 여전히 무수한 슈퍼 세이브를 만들어내며 철벽수문장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김병지는 1992년 울산 현대에 입단하면서 프로무대에 데뷔했다. 놀라운 순발력을 바탕으로 멋진 선방을 펼치면서 한국 최고의 골키퍼로 공인 받았고, 포항 스틸러스와 FC 서울, 경남 FC를 거친 뒤 올 시즌을 앞두고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했다. 2009년 11월 K-리그 최초로 500경기 출전을 기록하면서 건재를 과시한 그는, 2012년 10월 600경기 출전의 대업을 이뤘다. 김병지는 1995년 대표팀에 처음으로 발탁되어 총 62번의 A매치를 치렀다. 1998프랑스월드컵에서 대표팀의 참패 속에서도 '빛나는 선방쇼'를 펼치면서 주목 받았지만, 안방에서 펼쳐진 2002한일월드컵에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2001년 1월 홍콩 칼스버그컵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불필요한 드리블을 선보이며 거스 히딩크 감독을 화나게 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울 따름이다. 그는 울산 소속이던 1998년 포항과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극적인 역전 헤딩골을 터뜨리면서 '골 넣는 골키퍼'로도 인기를 누렸다.